2. 평양 감영의 담판: "신(臣)의 목숨을 담보로 청하옵니다"
안주 관아에 도착하자마자 원익이 마주한 것은 텅 빈 곳간의 서늘한 냉기였다. 장부에는 먼지만 쌓였고, 아전들은 고개를 숙인 채 "나라의 구휼이 끊긴 지 오래 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원익은 그길로 다시 조랑말에 올라 평양 감영으로 내달렸다.
평양 감사 권징은 갑작스러운 안주 목사의 방문에 의아해하며 그를 맞았다.
"아니, 이 목사. 부임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리 급히 달려왔는가? 먼 길 오느라 고생했으니 우선 차라도 한 잔 하며 숨을 돌리게나."
원익은 정중히 절을 올린 뒤, 찻잔을 잡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대감, 소관이 부임하여 본 안주의 풍경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옥이었사옵니다.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못해 서로를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대로 두면 안주라는 고을은 지도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권 감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안주의 사정이야 내 어찌 모르겠나. 하나 평양의 사정도 녹록지 않네. 자네가 바라는 것이 구휼미인가?"
"예, 대감. 평양 관창의 곡식만 석을 안주로 빌려주십시오. 이는 단순히 베풀어달라는 청이 아니라, 안주를 다시 살려내어 평양의 배후를 든든히 하려는 고육지책이옵니다."
"만 석이라니! 안주는 땅이 거칠어 농사가 망하기 일쑤인데, 그 큰 공물을 자네가 무슨 재주로 되갚으려나? 자칫하면 나까지 조정의 문책을 피할 수 없네."
원익은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의 앞에 다시 한번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권위를 누르는 고압적인 기운 대신, 진심이 담긴 묵직한 떨림이 있었다.
"대감, 안주는 평안도의 입구이자 요충지입니다. 이곳이 무너지면 평양 또한 안녕을 보장받을 수 없사옵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 약조하겠습니다. 내년 이맘때까지만 석을 이자까지 쳐서 한 톨도 어김없이 갚겠습니다."
원익이 고개를 들어 감사의 눈을 간절하게 응시했다.
"만약 기한 내에 갚지 못한다면, 소관의 관직을 거두고 이 목숨으로 그 죄를 묻으셔도 좋습니다. 대감께서 안주 백성들의 어버이가 되어 주신다면, 소관은 기꺼이 그 빚을 짊어지는 종이 되겠나이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진심 어린 호소와 단호한 책임감이 교차하는 노신의 눈빛에 권 감사는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 목사, 자네의 그 지독한 백성 사랑이 내 마음을 움직이는구먼. 알았네. 만 석을 내줄 터이니, 부디 자네의 그 귀한 목숨을 허투루 쓰지 않도록 안주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