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정유년, 피비린내 나는 국청(國廳)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 정유재란의 불길이 다시 강토를 짓밟았다.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과 선조의 질투가 빚어낸 올가미에 걸려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창경궁 뜰에 설치된 국청(國廳). 차가운 바닥에 무릎이 깨진 채 거적때기 위에 앉아 있는 이순신 위로, 서슬 퍼런 칼날보다 더 매서운 왕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순신은 나를 기만했다! 가짜 승전보로 조정을 농락했고, 적을 놓아주어 나라를 위태롭게 했다! 당장 그놈의 목을 쳐서 군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
선조의 목소리는 광기에 젖어 갈라져 있었다. 왕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그 서슬에 눌린 대신들은 고개를 처박은 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왕의 분노'라는 거대한 중력 앞에 누구도 거슬러 오르려 하지 않았다. 오직 이순신의 찢어진 옷자락에서 떨어진 핏방울만이 흙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오후 6시. 노을이 국청 마당을 핏빛으로 물들일 때, 영의정 이원익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발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전하, 통제사 이순신을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대신들이 경악하며 이원익의 뒷모습을 보았다. 선조의 눈이 번뜩였다.
"이 정승! 그대도 죽고 싶은 게냐? 저놈은 내 명을 어겼다!"
"전하, 신(臣)은 남해에서 그를 직접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속이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다 비워 나라를 담은 자입니다. 전하께서 죽이려는 것은 이순신 한 사람이 아니라, 이 나라를 지탱하는 유일한 방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