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먼지 속의 만장(輓章), 유배지의 상주가 되다

by 꿈 꾸는 철이

2. 흙먼지 속의 만장(輓章), 유배지의 상주가 되다


광해의 서슬 퍼런 칼날에 밀려 강원도 홍천으로 유배를 갔을 때, 원익은 이름 없는 호방(戶房)의 셋방에 몸을 의탁했다. 일국의 영의정을 지낸 이가 지방 관청의 말단 아전 집에 머무는 처량한 신세였으나,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그 춥고 고독한 시절, 호방의 부인은 자신의 끼니를 아껴가며 정성껏 밥을 지어 원익의 빈 배를 채워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극진히 대하던 그 아낙이 갑작스레 숨을 거두었다. 유배객 신분으로 남의 상가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 화가 될 수도 있었으나, 원익은 주저 없이 삿갓을 쓰고 상가(喪家)로 향했다.


"내가 장례를 주관하겠소. 내 생의 가장 추웠던 겨울을 덥혀준 고마운 분을 어찌 그냥 보낼 수 있겠소."


죄인의 몸이었으나 원익은 스스로 장례위원장을 자처했다. 전직 영의정이 말단 아전 부인의 장례를 이끄는 파격적인 광경에 마을 사람들과 배소의 관리들은 혀를 내둘렀다.


"대감, 유배객의 처지에 어찌 이토록 격에 맞지 않는 일을 하시렵니까? 뒷감당을 어찌 하시려고..."


주변의 만류에 원익은 지팡이를 짚고 서서 마른 입술로 응수했다.


"격(格)이라 하였소? 사람의 도리보다 높은 격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이오. 나를 먹여 살린 것은 대궐의 산해진미가 아니라 이 아낙이 건넨 따뜻한 밥 한 그릇이었소. 그 은혜에 마지막 절을 올리는 것이 어찌 격을 따질 일이란 말이오!"


그는 만장이 바람에 휘날리는 장례 행렬의 맨 앞에 서서, 상주를 다독이며 묵묵히 홍천의 거친 흙길을 걸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지극한 연민이었으며,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오직 사람의 진심만을 따랐던 거인의 참된 모습이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0화뙤약볕 아래 나란히 선 두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