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부끄럼 없는 길
1. 청백리(淸白吏), 재물의 중력을 거스른 생애
조선 오백 년의 준엄한 역사 속에서 ‘청백리’라는 이름표를 가슴에 단 이는 고작 이백십칠 명에 불과했다. 그것은 가문의 영광이기 이전에, 인간이 지닌 비루한 욕망의 중력을 온몸으로 거부해 낸 고통스러운 훈장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청백리라 하면 그저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궁상맞은 가난을 떠올리지만, 사실 청백리의 잣대는 ‘가진 것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재물을 대하는 ‘삶의 서슬 퍼런 태도’였다.
유산을 물려받아 곳간이 넉넉한 자일 지라도 그 마음이 물처럼 맑고 행실이 대나무처럼 곧다면 청백리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원익은 그 안온한 길마저 스스로 거부한 채, 가장 험난한 ‘청빈(淸貧)’의 길로 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쉰네 살이 되던 선조 34년(1601년), 조정은 그를 재물에 눈 돌리지 않고 오직 나라의 안녕만을 살피는 ‘청백리(淸白吏)’로 선정했다. 이는 이원익이라는 인물이 조선이라는 거대한 기계 안에서 가장 정직하게 돌아가는 부품임을 국가가 공인한 순간이었다.
그의 결기는 일곱 해에 걸친 참혹한 전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더욱 서릿발처럼 빛났다. 나라를 벼랑 끝에서 구해낸 호성공신(扈聖공신)에 책봉되자, 선조는 그에게 기름진 토지와 노비, 보화들을 비처럼 내렸다. 잿더미가 된 강토에서 그것은 무너진 가문을 일조에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권력의 단맛에 취한 이들이 공신 명단에 이름을 넣으려 이전투구할 때, 이원익은 그 화려한 하사품들을 앞에 두고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상소를 올렸다.
“전하, 산천은 피로 물들고 백성들은 제 자식의 살점을 뜯으며 연명하는 이 참혹한 강토에서, 신(臣)이 어찌 사사로이 기름진 땅을 차지하고 배를 불리겠습니까. 신 또한 이 환란을 막지 못한 죄인이거늘, 상을 받는 것은 도리가 아니옵니다. 부디 이 재물들을 거두어 굶주린 백성들의 목숨을 잇는 낱알로 써주소서.”
그것은 임금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에 대한 처절한 고백이었다. 남들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움켜쥐던 재물들을 그는 ‘백성의 눈물’이라 부르며 밀어냈다. 황희의 강직함과 맹사성의 유연함이 그의 핏줄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원익에게 재물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해야 할 중력이었다. 봉황은 오직 깨끗한 오동나무에만 깃든다는 믿음으로, 그는 제 삶에서 탐욕의 가지를 치고 또 쳤다. 비 새는 초가에서 삿갓을 쓰고 앉아 있던 노신의 청렴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젊은 시절부터 재물의 중력을 역행하여 일궈낸, 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생존의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