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네 해의 공직, 정파의 중력을 넘어선 거인

by 꿈 꾸는 철이

2. 예순네 해의 공직, 정파의 중력을 넘어선 거인


이원익의 삶은 곧 조선의 근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물세 살의 푸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원으로 첫발을 뗀 이래, 무려 예순네 해를 공직의 길에서 보냈다.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뀌는 그 기나긴 세월 동안, 그는 파도처럼 몰아치는 붕당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았다.


조선 중기, 정치는 ‘사림(士林)’이라는 거대한 숲 속에서 갈라진 동인과 서인,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찢겨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다. 이조전랑이라는 인사권 한 자리를 놓고 시작된 붕당의 불길은 노론과 소론으로 번지며 나라의 기틀을 좀먹고 있었다.


하지만 이원익은 남인(南人)이라는 신분을 지녔음에도, 북인 정권의 광해군과 서인 정권의 인조 모두에게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세 명의 임금을 모시며 여섯 번이나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던 이 경이로운 기록은, 그의 삶이 특정 정파의 이익이 아닌 오직 ‘현실적인 실무능력’과 ‘공정함’이라는 단단한 뿌리 위에 서 있었음을 증명한다.


특히 선조가 광해군을 칭찬할 때 곁을 지키던 노신은, 훗날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려 하자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소를 올렸다.


“전하, 대비께 효성을 다하는 것이 군왕의 도리이옵니다.”


그 대가는 홍천으로의 유배라는 가혹한 귀양길이었으나, 그는 권력의 중력에 굴복해 곡학아세(曲學阿世)하기보다 비바람 치는 산속의 고독을 택했다. 인조반정 이후, 선조의 손자인 인조가 보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찾은 이가 일흔일곱의 노정승 이원익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국가는 일흔이 넘은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 예조에서는 벼슬이 1품에 이르고 나이가 일곱 고개를 넘었으나 국가의 대사를 위해 은퇴시킬 수 없는 신료에게 내리는 최고의 영예, ‘궤장(几杖)’을 내릴 것을 청했다.


임금이 하사한 지팡이와 의자가 당도하던 날, 평생 청빈하게 살아온 그의 집 마당은 축하연을 열기는커녕 말 한 마리 돌릴 공간조차 없이 비좁았다. 결국 영의정의 궤장 연회는 집 앞 공터에서 동네잔치처럼 열려야 했다.


그는 여든 살이 넘어서까지 영의정의 무게를 짊어졌다. 40여 년을 정승으로 지내며 조선의 실핏줄을 다스렸던 이 작은 거인에게, 관직은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백성의 고통을 업고 가는 고행의 길이었다.


정파의 중력을 거슬러 오직 ‘안민(安民)’이라는 한 길로만 흐른 그의 예순네 해 공직 생활은, 훗날 조선을 다시 세우는 거대한 개혁의 뿌리이자 흔들리지 않는 중심축이 되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2화청백리(淸白吏), 재물의 중력을 거스른 생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