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끝에 새긴 훈계, 시대를 건너온 지혜

by 꿈 꾸는 철이

3. 붓끝에 새긴 훈계, 시대를 건너온 지혜


여든네 해의 풍파를 견뎌낸 노신(老臣)이 마지막으로 집어 든 것은 칼도, 관직의 명패도 아닌 낡은 붓 한 자루였다. 그는 평생을 청백리로 살며 체득한 지혜의 파편들을 자손들의 뼈에 새기듯 눌러썼다.


특히 여든둘의 노구로, 연풍(延豊) 현감으로 부임하는 손자 수약(守約)을 불러 앉힌 장면은 한 편의 엄숙한 의례와 같았다. 한양 인근 오리마을에서 출발해 남으로 내려가면 괴산 땅이 나오고, 그 끝자락에 연풍이 있다. 그곳을 지나 더 아래 경상도로 가려면 하늘에 맞닿은 이화령(梨花嶺) 고개를 기어이 넘어야 한다. 그 가파른 경계를 마주할 손자에게 할아버지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수약아, 네가 갈 연풍은 괴산을 지나 경상도로 이어지는 이화령 고갯길의 초입이다. 인생도 그 길과 같아 오르막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나, 고개를 넘어서는 내리막은 순간이지. 욕망이라는 날뛴 말에 제때 고삐를 당기지 못하면 순식간에 비극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법이다. 명심해라, 기적은 평생을 일궈야 오지만 비극은 단 한순간에 닥친다."


손자가 고개를 숙이자, 노정승의 준엄한 훈계가 이어졌다.


"가서 목민관으로서 딱 몇 가지만이라도 가슴에 새기거라. 백성을 사랑하여 네 욕심을 먼저 절제하고, 화가 난다 하여 함부로 상벌을 내리지 마라. 무엇보다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 참된 선정이다. 알겠느냐?"


"조부님,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이것은 그가 남긴 수많은 가르침 중 단편일 뿐이었다. 죽음을 앞둔 여든넷의 유서에서도 그의 결기는 서슬 퍼런 대화로 남았다.


"내 죽거든 풍수지리라는 허황된 말에 현혹되어 명당을 찾느라 소란 떨지 마라. 제사상? 거창할 것 없다. 열 개 남짓한 접시면 충분하니, 산 사람의 고혈을 짜내어 죽은 자의 형식을 채우지 마라. 그것이 내가 평생 지켜온 법도다."


그의 저서인 『오리집』과 『속오리집』, 그리고 『오리일기』에는 이처럼 자신을 깎아 세상을 비춘 노신의 지독한 성찰이 담겨 있다.


이를 지켜본 훗날의 다산 정약용은 전율하며 외쳤다.


"위대하다! 이 한 사람으로 인해 사직의 운명이 바뀌었고 백성이 주림을 면했으니, 정녕 한 몸으로 세상의 균형을 받치고 계셨도다!"


다산이 꼽은 조선 최고의 청백리. 이원익의 정신은 이제 기록을 넘어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땅의 역사로 살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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