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 재생, 윤회, 그리고 의도되는 희망

영화에 주관적 의미 부여하기

by 가현달

영화 '괴물'의 상징들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을 통해서 쓰는 글​


살다 보면 알 수 없는 이끌림이 있는 경우가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작은 정보들이 모여 길을 비추면 그 길을 가보지 않아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걸 아는 때가 있다.

'괴물'이 나에게는 그런 영화였다. 영화 포스터를 보고, 상영 정보를 보고 단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주말 근무가 잡혀있었지만 출근 전에 볼 수 있는 영화를 예매했다.


먼저 영화는 3가지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시선의 시작은 건물이 불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엄마인 사오리의 시선에서 선생님인 호리의 시선으로, 그리고 실제 사건의 본질로 교차하며, 시선 변경이 반복될수록 사실에 접근하게 되고, 그러한 반복을 통해서 하나의 상황을 우리가 다르게 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마도 이점이 감독이 우리에게 주는 의도가 아닐까 한다. 실제로도 이러한 방식은 영화를 보는 짧은 시간 안에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경험하게 한다.


영화 [괴물] 스틸컷

첫 번째 시선 : 사오리(싱글 맘인 미나토의 엄마)​


싱글 맘인 사오리는 영화에서 누구보다 헌신적이고 친구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한 사오리의 눈에 미나토의 담임선생님은 이상한 괴물처럼 보이게 된다. 이러한 변화 중에 하나는 세탁소에 찾아온 동네 아주머니의 말 한마디였다. 불이 난 건물에 걸즈바가 있는데 거기에서 호리 선생님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미나토가 처음으로 호리 선생님에 대한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다. 미나토와 사오리가 같이 베란다에서 건물에 불이 난 장면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여기서 미나토는 인간이 돼지의 뇌를 가지면 인간인지 돼지인지를 묻는다. 당황한 사오리가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냐고 묻는데 순간적으로 당황한 미나토는 호리 선생님께 들었다고 대답한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미나토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영화 후반에 교장선생님께 고백하는데, 그 이유는 요리와 관련되어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베란다에서 미나토가 아무 생각 없이 둘러댄 거짓말을 시작으로 호리 선생님은 미나토의 의도와 상관없이 괴물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사오리는 미나토의 몇 가지 이상한 징후들을 목격하게 된다. 그 이유가 호리 선생님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사오리가 이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그것은 학교를 찾아가서 주차하는 중에 후진하다가 실수로 사고를 내는 장면이다. 이 사건을 분기점으로 이후에 사오리의 시각은 굉장히 왜곡되며, 태도도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사오리가 부족한 물건을 사기 위해 가게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이때 미나토는 바닥에 지우개를 떨어뜨린다. 그런데 사오리가 가게에 다녀온 이후에도 미나토가 그대로 멈춰있다가 사오리가 들어오자 지우개를 줍는듯한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실제 상황이 아닌 사오리의 망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 순간의 사오리는 굉장히 편집증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객관성을 상실한 사오리는 학교에 찾아가서 선생님들 앞에서 물건을 던지기도 하고 교장의 얼굴에 손을 올리기도 하며, 대놓고 화를 내기도 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사오리의 무례한 행동에도 영화를 보는 중에는 그것이 지나치다고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시점까지 미나토의 이상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어 이미 사오리의 입장에 몰입하게 되었고, 사오리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이러한 사오리의 행동을 정당하게 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기술하면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영화를 보는 그 시점에서는 오히려 사오리의 입장에 동조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선입견은 뒤이어지는 호리 선생님의 시각을 경험하며 무너지게 되고 감독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경험을 하게 만든다.


미나토와 같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요리는 친구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로 그려진다. 요리의 아버지는 요리에게 돼지의 뇌를 가진 병이 있는 아이로 취급한다. 그러한 요리도 호리 선생님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사건이 호리 선생님을 궁지로 몰아넣게 된다.


영화에서는 요리의 거짓말은 미나토를 보호하기 위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호리와 미나토는 서로에 대한 비밀을 가지고 있고,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호리 선생님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게 되며, 그 결과 호리 선생님은 괴물로 만들어져 간다. 아이들은 서로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아이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황은 흘러갔다.


영화 [괴물] 스틸컷

두 번째 시선 : 호리(미나토의 담임선생님)​


선생님의 시선도 불이 난 건물 근처에서 시작한다. 지금까지 관객은 호리 선생님이 불이 난 건물의 걸즈바에 있었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 장면에서 호리 선생님은 걸즈바에 있었던 게 아니고, 본인의 여자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오리의 시선에서 보이는 선생님은 성의 없고 영혼이 없는 이상한 사람처럼 그려지지만 호리의 시선에서는 마음 따뜻한 선생님으로 그려진다. 이 상황을 보게 되며 순식간에 관객은 괴물이었던 호리가 좋은 선생님 일수 있다는 급격한 시선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파렴치한 선생으로 몰리며 직장까지 잃은 호리지만 일방적인 피해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히는 주범으로 오해하기도 하고, 교장선생님에게도 편견을 보여준다. 호리의 시선에서 교장선생님은 손녀와의 사진을 학부모가 보도록 의도하는 사람이며, 사건을 축소하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선생님 개인에게 억울한 누명을 강요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호리도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손녀의 사고에 관해 소문을 듣게 되는데, 실제 사고는 교장선생님이 내고 남편이 대신 죄를 뒤집어썼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소문이 호리가 교장선생님을 괴물로 보기 시작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 이처럼 영화는 특정인을 일방적 피해자나 가해자로 그리지 않는다. 누구나 가해자 일수 있고 피해자 일수 있다.


영화로 돌아와서 학부모의 민원을 큰 문제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 학교 측에서는 무작정 호리에게 사과를 강요하며, 그렇게 호리는 일방적으로 가해자로 만들어진다.


영화에서는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하는 장면이 여럿 존재한다. 미나토가 양호실에서 사라진 상황에서 난간 쪽 문이 열려있는 장면이나, 태풍이 온 다음날 미나토 방의 창문이 열린 채 미나토가 사라져 있는 장면, 호리 선생님이 학교 옥상의 난간에 서는 장면, 교장선생님이 다리 위에서 강을 바라보는 장면 등이다. 또 요리가 자신의 집에 있는 욕조에서 물에 잠겨있는 듯한 장면도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하는 장면 뒤에는 치유의 상징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점이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폐인처럼 변한 호리가 다시 학교에서 미나토를 찾아갔다가 절망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려는 장면이 있다. 건물 지붕의 난간에 서는 순간 들려오는 관악기의 소리가 있다. 나는 이 소리를 고래의 울음소리로 들었다. 이 소리는 교장선생님과 미나토가 부는 관악기의 소리로 이는 치유를 상징한다.


이처럼 영화에서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장면을 보여주지만 이내 희망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결말도 희망적으로 그려낸다. 이 부분이 나에게 큰 영향을 줬다. 의도적으로라도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영화에서 호리는 좌절하는 중에 바닥에 물을 쏟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호리가 학교에서 숙제로 쓴 글을 발견한다. 이 글을 통해서 미나토와 호리의 우정을 확인하며 진실을 보게 된다. 여기서도 상징이 존재하는데 바로 물에 젖은 종이다. 물은 치유를 상징한다.​


영화 [괴물] 스틸컷

마지막 시선 : 실제 사건으로의 접근


세 번째 시점은 실제 사실을 보여주는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교장선생님이 불난 건물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에서 라이터를 떨어뜨리는 요리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관객은 건물에 불을 낸 범인이 요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요리가 불을 낸 게 맞다고 생각한다. 불이 주는 상징 때문이다. 요리는 불로써 심판하고 윤회를 끝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하면 영화에서는 다시 태어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거기에 쓰이는 방식이 불을 통한 화장과. 흙으로 묻어주는 매장의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불은 심판과 종말을 상징하고, 흙은 재생과 윤회를 상징한다고 본다.


요리는 건물에 불을 지르고, 고양이를 화장시킨다. 재미있는 장면이 있는데 요리는 맨홀에 귀를 대고 고양이에게 꺼내줄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고양이는 요리 자신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 힘들어하는 요리는 자신을 포기하고 멈추고 싶어 한다. 그래서 고양이를 화장시킨다.


미나토는 엄마인 사오리에게 아버지를 묻어줄 때 얼굴에도 흙을 뿌렸냐고 묻는다. 요리와 고양이를 묻어줄 때도 얼굴에 흙을 뿌리냐고 묻는다. 계속 다시 태어남을 이야기한다. 요리가 고양이에게 불을 붙였을 때 미나토는 물병에 물과 흙을 담아 부어준다. 이것은 상처받은 요리를 치유하는 실험이었다. 역시 여기서도 물은 치유를 상징하며, 흙은 재생을 상징한다. 영화에서도 엄마인 사오리가 물병을 씻는 과정에서 물과 흙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 미나토는 실험을 한 거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상징은 결말과도 관계가 있다. 결국 미나토의 방식대로 둘은 기차 안에서 비가 쏟아지는 태풍 속에서 흙으로 묻힘을 경험하며 재생하고 치유받게 된다.


영화에서 열차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존재한다. 열차에서 시간을 보내며 미나토와 요리는 서로 관계를 맺어간다. 여기서 터널은 현실과 분리된 세계로 이끌어주는 통로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처럼 터널을 지나서 만나는 공간은 현실과 다른 세계로 그려진다.


영화 후반부에서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는 요리를 구하러 찾아간 미나토는 요리에게 '빅 크런치'가 오고 있다고 말한다. 밖은 태풍으로 혼란했다. 모든 것이 파괴되는 빅 크런치 후에는 모든 것이 태초로 돌아가며, 흙에 묻혀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둘이서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었다. 태풍을 뚫고 둘은 터널을 지나 기차에 탑승하게 되는데 이때 산사태로 열차는 흙에 묻히게 된다. 이렇게 흙에 매장됨으로써 둘은 다시 태어남을 겪게 된다. 산사태가 일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둘은 기차가 출발하는 소리라고 말한다.


영화 중반에서는 열차와 철로 사이에 울타리가 있어 단절되어 있지만 태풍이 오고 난 후 열차에서 재생을 겪은 둘이 달려 나간 들판에서는 울타리가 사라진 철로를 발견하며 영화는 끝나게 된다.​


영화 [괴물] 스틸컷

영화가 주는 메시지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


정말 정밀하게 짜인 시나리오는 곳곳이 상징이며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세밀한 장치가 영화에 더욱 몰입하게 함으로써 영화를 보는 짧은 시간에 같은 사건에 대해서 서로 다른 시선을 경험하게 해 준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준다. 개인의 시선을 벗어나는 경험이라는 것은 결국 본인이 가진 고정관념을 잠시 벗어난다는 의미와 같다.


결국 감독이 주는 메시지는 차별받는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획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본질을 말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공격받기 쉽다.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공격하는 게 아니다. 듣기 전부터 공격을 시작하며,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하게 막는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누군가는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정중하게 설득해도 다양성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은 3번의 시선을 경험하게 하며 각각의 시선에 감정을 몰입하게 하고 결국 마지막에 소수자의 시선에도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 인도한다.


미나토는 초반에 요리에게 학교에서는 말을 걸지 말라고 한다. 요리가 알겠다고 하자 미나토는 고맙다고 대답한다. 요리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미나토 본인도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본인을 지키기 위해서 비자발적이고 수동적으로 요리를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협조한다. 이것이 우리가 쉽게 소수자에게 동조하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꺼낼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초반에 사오리가 오해했던 미나토의 이상행동은 보통 이렇게 미나토가 요리에게 잘못된 행동이나 말을 했을 때였다.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미나토는 요리에게 학교에서는 말을 걸지 말라고 말하고 난 후 집에 와서 스스로 본인의 머리카락을 자른다. 자신에게 벌을 주는 모습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단어인 '돼지의 뇌'는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을 가지는 사람을 비하하는 상징으로 그려진다. 요리의 아버지는 요리가 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요리가 돼지의 뇌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하며 학대한다.​


영화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감독의 의도가 많이 보인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의도의 밑바닥에는 현실이 힘들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현실이 힘들기 때문에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힘든 인생을 살아가려면 인간은 고정관념에 의지하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정관념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모든 인간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깨달음을 얻지 못해서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고정관념을 가진 나 자신을 욕하지 못하고 타인을 욕하지 못한다. ​​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인간에게 유일한 해결책은 고정관념뿐이다. 고정관념마저 없으면 단 하루도 불합리한 인생을 살아갈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영화 '괴물'은 강제로 깨달음 없이 잠시나마 고정관념을 넘어서 본질을 볼 수 있게 도와준다. 적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은 고정관념을 잠시 넘어서 볼 수 있게 도와준다. 이점은 누군가에게는 불편함 일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공감의 눈물일 수 있다. 나에게는 눈물이었다. 내가 고정관념을 가진 평범한 인간인 걸 알기에 평범한 고정관념을 잠시나마 넘어서는 경험은 큰 울림을 주었다.


영화 [괴물] 스틸컷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며 쓰는 사적인 감상


개인적으로 느낀 감상을 이야기하면, 영화의 모든 것을 넘어서서 나는 '괴물'을 통해서 희망에 대한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를 보는 동안 희망은 인위적이고 목적이 분명한 감독의 의도로 보였다. 가만히 있으면 힘든 현실 속에서 끊임없는 절망의 심해로 빨려 들어가기 쉬우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의도적으로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영화의 결말이 희망적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내가 영화 '괴물'을 통해서 얻은 시선은 의도적으로 말해야만 하는 희망이었다. ​​


그것은 의도된 희망이었다. 고정관념을 넘어설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면, 희망을 의도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래야 단 하루라도 힘든 현실을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나 자신에게 설명할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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