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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고 있다는 누가 평가하나

학생 타이틀을 벗어나서

by 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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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3년동안’이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원이 된 지 3년이 좀 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턴십을 할 때 정규직 사람들이 왜 인턴을 차별대우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정규직 사람들보다 일을 더 많이 하는데? 물론 그냥 순수 코딩 노동(?)을 하긴 했지만, 그때 당시 내 생각에는 내가 일을 더 많이, 제일 먼저 출근해서 제일 마지막에 퇴근하니 인턴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야 그 사람들의 생각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인턴이 못하거나 그런다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인턴들이 요즘 IT 트렌드를 알고 있는 경우도 많고, 특히 개발자에게 꼭 필요한 젊은 뇌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고 학생이라는 타이틀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학생이라는 틀 자체가 너무 크다. 어떤 것이 잘하는 기준이고 못하는 기준인지 학교에서는 명확히 정해주니까, 그 기준만 잘 따르면 모범생인 거다. 모범생이 되는 게 결코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따라주면 사람들이 모범생이라 알아주니까.


사회에 나와보니 내가 잘했다 못했다는 평가는 1년에 딱 한 번. 그것도 0점에서 100점까지 세세하게 점수가 나오는 것도 아닌, 잘했다/평균이다/못했다 이렇게 딱 3가지로만 평가가 된다. 그리고 이것도 절대적인 평가가 아니라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평가, 얼마나 정치질을 잘했냐의 평가라서 참... 나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점수를 정해주는 커리큘럼만 있으면 난 잘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인데, 사회에서는 내 인생의 잘하는 기준을 누가 정해주지는 않더라.


우리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내가 뭐만 하면 예뻐해주고 잘한다 하고, 지금은 더 잘하고 있다 하니 사랑받는 건 좋지만... 어... 그건 객관적인 평가가 될 수 없는 것 같다. 학교에서는 정해진 기준을 잘 따라가면 모범생이 되지만, 사회에 나오면 기준 자체가 없다. 그래서 방황한다. 뭘 해야 잘하는 건지 모르고, 주변에서 칭찬을 해주거나 절대적인 ‘잘했다’의 기준도 없으니 헤매게 되는 것 같다. 그게 지금의 나고.


그렇게 헤매다 보니 3년 동안 이룬 게 없다. 뭐 이뤘다고 해봤자, 장롱 면허를 제대로 쓸 수 있게 됐고 운전이 무서웠던 내가 이제는 겁이 없어졌다는 것? 매번 잘릴까 봐 불안해했던 내가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 정도이려나. 아, 그리고 이제는 학생도 아니라 사람을 정기적으로 만날 곳이 회사밖에 없고, 회사 사람들을 밖에서까지 만나고 싶지 않으니 취미 생활을 찾게 됐다는 것. 요즘은 보드게임이 그렇게 재밌을 수 없다. 하지만 취미를 갖는 것 자체가 뭘 이뤘다고 할 순 없지 않나. 그냥 인생의 재미가 추가된 거지.


누가 잘해준다 말해주지 않으니 내가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문제는 내가 뭘 해야 스스로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잘 사는 인생의 기준이 뭔지. 예전에 내가 그렇게 되고 싶었던 회사원이 됐지만, 막상 회사원이 되고 나니 스스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게 다... 정도?


지금의 나는 앞으로 내가 뭘 해야 잘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그걸 조금만 더 고민해봐야지. 어쩌면 스스로에게 기준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진짜 성장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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