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내가 된다

: 자극적인 세상에서, 기꺼이 말랑말랑한 멜로를 선택하는 이유

by 김가인 오로시

나는 지금 멈춰 있다.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의 마지막 12화를 목전에 두고,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서성이고 있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 이야기가 끝나버리면, 지금 내 안을 채우고 있는 이 간질간질하고 말랑말랑한 공기마저 증발해 버릴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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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한다. 요즘 나를 숨 쉬게 하는 원동력은 다름 아닌 '멜로'다.

사실 나는 꽤 오랫동안 로맨스 장르를 기피해 온 사람이었다. "저런 사랑은 현실에 없어." 표면적인 이유는 냉소였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화면 속의 완벽한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 비루한 현실로 내동댕이쳐지는 그 낙차가 두려웠던 것이다. 드라마의 엔딩과 함께 내 사랑에 대한 기대와 희망도 셔터를 내릴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무언가에 꽂히면 끝을 볼 때까지 파고드는 '과몰입형 인간'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보는 동안에는 현실의 나를 잊고 그 세계의 주민이 되어버린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일상의 무게를 견디며 조금은 무뎌지고 관조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믿었건만... 이번 드라마는 나의 그 빗장을 보란 듯이 해제시켜 버렸다. 하루에 한 편씩 아껴보려던 다짐은 무너졌고, 어제는 내리 다섯 편을 몰아봤으며, 오늘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남은 회차를 삼켜버렸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한 시간. 이 기로에서 나는 문득, 지난 며칠간 달라진 나의 태도를 발견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사랑에 서서히 스며든 탓일까. 놀랍게도 나는 조금 '착해졌다'. 평소라면 툭 하고 놓았을 물건을 사뿐히 내려놓고, 거칠게 닫던 문을 살살 닫는다. 청소기를 미는 손길도, 아이에게 건네는 말투도 한결 고분고분하고 부드러워졌다. 팍팍한 현실을 사느라 굳은살이 박여있던 내 마음이, 멜로 드라마라는 연고를 바르고 새살처럼 보드라워진 것이다.


이 변화를 느끼며 생각한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을 닮아가는구나."


잔인하고 살벌한 스릴러를 본 날이면 나도 모르게 눈빛이 날카로워지고 타인을 의심하게 된다. 반면, 달콤하고 다정한 이야기를 본 날에는 나도 누군가에게 꿀처럼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의식적으로 '좋은 것'만 보려고 노력해 왔다. 자극적이고 잔인한 소재, 거대한 스케일로 압도하려는 콘텐츠들이 유행하는 시대지만, 나는 여전히 잔잔하게 스며드는 이야기 편에 서고 싶다.


세상이 뾰족하다고 해서 나까지 뾰족해질 필요는 없으니까. 내 안의 다정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해서 예쁜 것을 보고 순한 이야기를 섭취해야겠다.


고민은 끝났다. 나는 오늘 밤, 기꺼이 마지막 회를 볼 것이다. 이야기는 끝나겠지만, 그들이 남긴 그 말랑말랑한 온기는 내 현실로 가져와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내일 아침, 나의 세상은 여전히 멜로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다정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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