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내 편은 내가 가장 빛날 때 증명된다

: 슬픔을 위로하기는 쉬워도, 기쁨을 축하하기는 어려운 이유

by 김가인 오로시

어제는 멀리서 귀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서울도 아닌 이 먼 구리까지, 나를 보겠다고 시간을 내어 달려와 준 고마운 친구들. 우리는 카페에 마주 앉아 꽤 긴 시간 동안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가는 친구들을 배웅하고 혼자 남은 밤, 수많은 대화의 파편 중 유독 하나의 문장이 가시처럼 마음에 걸려 빠지지 않았다.


"진짜 그 사람이 나를 위하는지를 알려면, 내가 힘들 때가 아니라 '내가 잘됐을 때'를 봐야 해."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은 반대 아닌가? 내가 가장 비참하고 바닥을 칠 때 떠나지 않고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진짜'라고 배웠으니까. 하지만 친구의 이어지는 설명은 인간 내면의 가장 은밀한 곳을 찌르고 있었다.


누군가 힘들 때 "힘내", "다 잘될 거야"라고 위로하는 건 생각보다 쉽다. 물론 그 걱정이 가짜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 한구석에는 무의식적인 안도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상황이 낫구나.' '나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구나.' 타인의 불행 앞에서 느끼는 미묘한 우월감, 혹은 나의 평온함을 확인받는 비루한 안도감이 그 위로를 조금 더 수월하게 만든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다르다. 내가 갑자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거나, 뜻밖의 행운을 거머쥐었을 때를 상상해 본다. 친구가 로또 1등에 당첨되었다거나, 내가 꿈꾸던 상을 먼저 받았다거나, 감히 넘볼 수 없는 부를 얻게 되었을 때. 그때 배 아픈 기색 하나 없이, 눈을 반짝이며 "세상에, 넌 그럴 자격이 있어! 정말 축하해!"라고 소리쳐 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입으로는 "축하해"라고 말하며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왜 하필 쟤야?', '나는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며 시샘하고, 박탈감을 느끼고, 끝내는 그 친구를 깎아내리고 싶어지는 마음.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지만, 기쁨은 나누면 질투가 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 냉정한 통찰 앞에서 나는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과연 어떤 친구인가. 친구가 힘들 때 밥을 사고 술을 사며 어깨를 빌려주는 건 자신 있다. 하지만 친구가 나보다 훨씬 더 높고 빛나는 곳으로 비상할 때, 나는 진심으로 그 비행을 올려다보며 박수 칠 수 있을까? 나의 결핍이 건드려지는 순간에도, 나는 의연하게 타인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사람인가?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나 역시 평범한 인간이라, "잘됐다"는 말 뒤에 씁쓸한 침을 삼킬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니 서로를 응원하지만, 격차가 벌어지는 순간에도 이 마음이 변치 않을 거라고 100% 장담하기엔 나는 아직 덜 여물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밤, 신에게 조금 다른 기도를 올린다.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잘되기를. 그리고 그들이 눈부시게 빛나는 순간이 왔을 때, 내 마음속에 옹졸한 시샘 대신 "내 친구가 이렇게 멋지다"는 자부심이 들어찰 수 있기를. 나의 그릇이 타인의 행복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 만큼 넉넉해지기를.


그리고 하나 더. 나의 이런 진심을 약점 잡아, 호의를 권리로 착각하는 이들을 알아보는 눈도 주시기를. 함께 기뻐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더 큰 마음을 내어주되, 나를 감정의 쓰레기통이나 호구로 여기는 관계는 단호하게 가지치기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진짜 관계는 불행이 아니라 행복 앞에서 증명된다. 나는 누군가의 행복을 나의 행복처럼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진짜'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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