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죄책감을 팝니다

: 환경 파괴자와 카페 사장, 그 사이의 아이러니

by 김가인 오로시

나는 카페 사장이다. 동시에 나는 매일 백여 개의 쓰레기를 세상에 내놓는 '환경 파괴자'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내 손끝은 하얀 종이컵과 투명한 플라스틱 컵을 스친다. 갓 내린 커피의 온기를 담아 건네는 그 컵들이, 누군가의 손에서 10분, 길면 30분 정도 머물다가 결국 쓰레기통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데, 어쩌다 보니 나는 편리함을 팔고 그 대가로 쓰레기를 남기는 구조 속에 서 있다.


참 얄궂은 일이다. 사람들은, 그리고 나조차도 점점 더 편리한 것에 길들여진다. 무거운 머그잔을 씻는 번거로움보다는 가벼운 일회용의 간편함을 사랑한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지구를 지키자", "환경이 걱정이다"라는 말을 뱉는다. 편리함은 포기 못 하면서 지구는 걱정하는 이 거대한 모순. 나는 그 역설적인 풍경의 한복판에서 매일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한때는 환경에 관한 시를 써보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관련 다큐멘터리를 몰아서 본 적이 있다. 빙하가 무너지고, 플라스틱을 먹은 새가 죽어가고, 쓰레기 산이 불타는 장면들. 시간 날 때마다 찾아본 그 영상들이 내게 남긴 결론은 참담했다.


"이 지구상에서 인간은 멸종하는 게 유일한 답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 결론밖에 없었다. 화면을 볼수록 나는 한없이 우울해졌고, 비관적인 염세주의자가 되어갔다. 환경에 가까워지려 노력할수록 '나'라는 존재 자체가 지구에 해악이라는 자기부정이 심해졌다. 결국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다큐멘터리 시청을 멈췄다. 환경에 대한 시도 쓰지 않기로 했다. 그건 시가 아니라 유서가 될 것 같았으니까.


그 죄책감의 발로일까. 나는 카페에서 텀블러를 가져오는 손님에게 할인을 해준다. 조금이나마 환경에 도움이 되고자 시작한 나만의 소심한 속죄 의식이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잘 모르겠다. 이게 정말 도움이 되기는 하는 건지. 사람들은 "작은 실천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든다", "티끌 모아 태산이다"라고 희망을 말하지만, 나는 아직 덜 자란 어른인 건지 그 말이 도무지 와닿지 않는다. 살면서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는 기적을 본 적이 별로 없어서일까. 하루에 쏟아지는 수만 톤의 산업 쓰레기 앞에서, 고작 내 카페의 컵 몇 개 줄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깊은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할인을 해준다. 도움이 되는지 확신할 수는 없으나, 된다고들 하니까, 넋 놓고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해본다.


컵 이야기를 하려다 인간의 멸종까지 가버렸지만, 내 마음의 본질은 거기에 있다. 거창한 지구 지킴이는 못 되더라도, 적어도 '미안해할 줄 아는' 파괴자로 남고 싶은 마음.


티끌 모아 태산이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내가 건넨 텀블러 할인 하나가, 내 마음속에 쌓이는 죄책감의 티끌 하나는 덜어주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오늘도 모순된 마음으로 컵을 꺼낸다. 편리해서 미안하고, 미안하면서도 건넬 수밖에 없는, 이 씁쓸한 아이러니를 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