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채와 유화 사이에서, 나는 파초를 그린다
며칠 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파초일까?”
나는 요즘 파초도를 그리고 있다.
종이에 분채를 사용해 그리기도 하고,
때론 캔버스 위에 유화로 그리기도 한다.
민화 속 이미지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단순히 ‘전통’이라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왜 이렇게까지 파초에 마음이 끌리는 걸까.
나는 왜 파초도를 이렇게 자꾸 그리고 있는 걸까
처음 파초도를 봤을 땐,
그저 조금 괴상하게 생긴
초록색 식물 그림이었다.
너무 크고,
너무 짙고,
어딘지 낯설고 이질적인 그 초록 잎들이
왠지 모르게 눈에 밟혔다.
민화 공부를 하면서야 알게 되었다.
이 풀잎은 그냥 ‘풀’이 아니라
파초라는 식물이며,
그걸 그린 그림이 파초도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파초는 조선시대의 민화뿐 아니라
문인화, 사군자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한여름, 무성하게 뻗은 잎.
넓고 큼직한 곡선.
한 폭의 여백을 가득 채우면서도,
텅 빈 공간을 남겨두는 이상한 균형.
파초도는 고요하지만 강한 기운이 있다.
바람이 스치면 일렁이고,
비가 오면 소리를 내며 흩날리는 그 잎처럼
그림 속 파초도
어딘가 흔들리는 마음을 닮아 있다.
아마도 나는
요즘 내 마음이 ‘파초 같다’고 느끼는 것 같다.
넓고 유연하지만 쉽게 찢어지는 잎.
햇빛을 받으면 투명해지고,
비를 맞으면 축 늘어지는 그 질감.
분채로 그릴 때는
정교하고 절제된 표현이 나온다.
그릴수록 내가 사라지고,
잎의 선만 남는다.
유화로 그릴 때는
색과 덩어리가 감정을 밀고 나간다.
질감이 살아 있고,
감정도 더 살아 있다.
형태보다 기분에 가까운 표현.
이 두 가지 방식으로
나는 파초를,
그리고 내 마음을 번갈아가며
그리고 있는 것이다.
‘사라짐’을 담고 있는 식물.
바람에 흔들리고, 쉽게 찢기고, 금세 사라진다.
‘흔들림’을 감각하게 하는 잎의 선들.
절대 정적인 식물이 아닌, 살아있는 움직임이 있다.
‘불완전함의 아름다움’.
끝이 닳고 찢겨진 잎도, 그것대로 아름답다.
그래서 나는
파초도를 그릴 때,
한 번도 완전한 잎을
그려본 적이 없다.
조금은 닳고,
조금은 상하고,
조금은 흐려진 그런 잎들.
그게 지금의 나와 너무 닮아 있어서.
파초도를 그린다는 건
흔들림을 담는 일이다.
완벽한 식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을 입혀
잎 하나하나를 쌓아가는 작업.
나는 여전히
‘왜 파초인가’에 대해
정확한 해답은 못 찾았지만,
그릴수록
내 안의 어떤 공백이
채워지는 걸 느낀다.
그 공백은 감정일 수도 있고,
기억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주 작은 숨소리일지도.
요즘 나는
파초도를 통해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조용히 번지는 초록의 기운 속에서
지금 내 마음의 날씨를 그린다.
그리고 어쩌면,
다음은 다른 식물이
나를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또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겠지.
하지만 지금은,
나는 여전히 파초도의 흔들림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