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앞에 멈추는 마음

민화를 배우며

by 김가인 오로시

민화를 배우면서 나는 늘 색 앞에 멈춘다.


어떤 색을 얼마나 겹쳐 쓸 것인가, 어디까지 스며들게 할 것인가.


민화는 단순히 선을 따라 채색하는 일이 아니라,

색이 주는 힘을 깊이 느끼게 하는 공부다.


처음에는 그저 색을 칠하는 일 같았다.

정해진 선 안에 맞추어 붓을 움직이고,

색을 바림하며 화면을 채워나가는 것.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되었다.

같은 붓질이라도 마음의 상태에 따라 색은 다르게 번지고,

같은 물감이라도 겹치는 층에 따라 전혀 다른 빛을 낸다는 것을.




빨강은 늘 강렬하다.


하지만 단순히 화려한 색으로만 남지 않는다. 불을 닮고 피를 닮은 빨강은 두려움과 생명력을 동시에 품고 있다. 민화에서 빨강은 악귀를 막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 붉은 기운을 한지 위에 얹고 있노라면, 어쩐지 내 마음 속 두려움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 같다.




파랑은 깊다.


바다와 하늘처럼 멀리 뻗어가면서도, 동시에 차분히 내려앉는다. 청색을 바림할 때마다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 속에서 오래도록 이어지고 싶은 어떤 영원성이 느껴진다.




노랑은 빛난다.


햇살처럼, 금빛처럼 화면 전체를 밀어 올린다. 민화에서 노랑은 풍요와 신성을 의미한다. 노랑을 얹고 나면 그림이 한층 더 환해지고, 그 빛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민화를 배우는 일은 결국 색과 나 사이의 대화를 배우는 일이었다.

어떤 날은 색이 잘 스며들지 않는다. 마음이 바쁘거나 조급하면 물감은 쉽게 얼룩진다. 반대로 천천히 호흡하며 기다리면, 물감은 한지 위에서 고르게 퍼져 나간다. 그 과정을 보며 깨닫는다. 색은 내 마음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색으로 내 삶을 기록할 수 있을까?”


민화는 오래된 전통의 그림이지만, 나에게는 오늘의 감정을 붙잡는 기록이 된다.
붓 끝에서 번지는 색 하나에도 삶의 무게가 실리고, 작은 여백에도 나의 시간이 담긴다.





색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드러내는 또 다른 언어다.
민화는 그 언어를 배우는 공부이고, 나는 지금도 색 앞에서 멈추어 나의 마음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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