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충도 앞에 다시 서게 된 이유
요즘 다시 민화를 그리고 있다.
프리랜서의 바쁜 일정이 조금씩 비워지면서,
비어 있는 시간 속에서 오히려 오래 묻어두었던 생각들이
천천히 떠오르고 있다.
오늘은 초충도 밑그림을 그렸다.
작고 단순해 보이는 소재라
‘다시 흥미를 붙여보자’는 마음으로 선택했는데,
선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이 질문이 들었다.
“왜 신사임당은 초충도를 그렸을까?”
그리고
“왜 나는 지금 초충도에 눈이 갈까?”
그 질문이 하루 종일 마음을 붙잡았다.
초충도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늘 비슷하다.
‘부드러운 여성성의 상징’,
‘자녀 교육의 이상’,
‘자연과 생명의 순환을 관찰한 그림’
그리고
‘명문가 아내로서의 품행과 덕성을 드러낸 그림’이라고.
전통적으로는 이런 식의 장식적·상징적 의미가 강조된다.
나도 그 설명을 수없이 봤지만, 솔직히 말해
내 마음에는 크게 닿지 않는다.
초충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림의 중심은 ‘여성적 덕성’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생명의 움직임이다.
풀잎 하나, 벌레 한 마리,
그들의 관계와 자리,
그 미세한 세계를 붙잡는 시선.
나는 오히려 신사임당이
자신의 현실적 역할과 사회적 틀 속에서도
“자기만의 세계를 응시한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여성성이나 교육의 상징 이전에,
한 개인의 관찰과 기록이 먼저였다.
벌레와 풀잎은
그 당대 회화 기준에서 큰 주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작은 것들’.
대단한 서사도, 화려한 풍경도 아니다.
그런데 신사임당은
그 작은 세계를 끝까지 들여다보고,
한 폭에 담았다.
나는 이 지점이 무척 좋다.
크고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손가락만 한 생명을 주목했다는 사실.
그게 결국 관찰자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점.
민화는 늘 “일상의 그림”이라고 하지만
초충도는 조금 다르다.
밑그림을 그리면서 나에게도
똑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왜 지금 초충도일까?
아마 나는 요즘
‘크고 화려한 그림’이 아니라
작은 세계의 질서를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시기인 것 같다.
프리랜서로 정신없이 시기를 지나고
카페 일, 디자인 일, 사진 일에 몰두할 때는
늘 긴장감이 있었다.
해야 하는 일에 계산된 에너지.
그 속에서는
‘작고 사소한 것’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삶의 속도가 느려지니
다시 작은 것들이 보인다.
창밖의 빛,
아이의 발걸음,
우리 로나의 털,
그리고 종이 위의 작은 곤충 한 마리.
초충도는 그런 작은 세계와
내 마음의 리듬이 정확히 맞닿아 있는 그림이다.
민화를 그리는 과정은
단순한 기교나 전통을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결이 반영된다.
선이 흔들리면 마음도 흔들려 있고,
색이 옅으면 자신감이 부족하고,
겹겹이 칠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시선이 깊어진다.
그리고 민화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 사람인지’를
그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 안의 중심을 찾는 그림.
그렇기 때문에 초충도 앞에서
나는 다시 질문하게 된다.
“나는 왜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무엇을 들여다보고 싶은 걸까?”
“지금 내 마음에 필요한 그림은 무엇일까?”
초충도를 찾아보면 늘
예의, 덕성, 여성성 등의 해석이 덧붙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본다.
초충도는 신사임당 자신의
가장 내밀한 관찰 기록이다.
가정 안의 역할을 넘어
‘자신이 보고 싶은 세계’를 그린 사람.
그 세계는 작지만, 그 안에는
삶의 리듬, 생명의 순환, 마음의 간격이 담겨 있다.
그래서 지금의 나도
초충도를 다시 그리고 싶어지는 것 아닐까.
삶의 속도가 잠시 멈춘 자리에서
작은 세계를 다시 보는 것.
그리고 그 세계를 통해
조용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그게 민화가 나에게 주는 역할이다.
초충도를 그리며 나는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어떤 작은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작은 세계는 내 마음의 어디를 비추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