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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니 Dec 21. 2020

제가 계약할게요

집 계약이 이렇게 쉬운 거였어?

정말 단순하게 은행에 가서 확인만 받아보자는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성격상 철저하게 준비하자 싶어 대출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준비해서 은행으로 갔다.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해왔고 연체 이력 한 번 없이 차곡차곡 신용도를 쌓아 온 탓에 전세보증금의 80%는 당연하게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김에 집도 보러 갔다. 본가와 회사에서 멀지 않은 오래된 아파트를 보러 갔다. 그런데 이 집이 얼마나 최악의 집이냐면 부동산 아주머니가 보여주면서도 민망해하셨다. 전에 살던 세입자가 전세금도 안 빼고 물건도 안 빼고 이사를 가버려서 짐이 잔뜩 쌓여있었다. 도배는 다 찢어지고 문도 다 부서져서 시트지로 대충 발라놓고, 타서 눌어붙은 장판이며, 20년 된 아파트 처음 그대로의 화장실(게다가 변기가 엄청 더러웠다!) 그 집을 보고 있자면 가정폭력 현장 그리고 그걸 참지 못한 야반도주의 스토리가 저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집 전세금을 다른 올수리 집과 동일하게 받겠다는 것이다. 부동산 아주머니의 태도를 보면 집주인이 별로 집을 고쳐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수리해 줄 생각이라면 그걸 적극적으로 어필했을 텐데, 도배도 원래 새로 한 건데 시공을 잘못해서 찢어진 거고, 싱크대 새 거니깐(어딜 봐서!) 시트지도 붙이지 말라고 했다. 솔직히 그 집은 공짜로 들어와 살라고 해도 안 살 것 같은 집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중기청 받아 들어간 친구네 집은 깔끔하고 좋아서 거기로 보러 간 거였는데 실망감이 밀려왔다. 갑자기 독립이 귀찮아졌다. 내년에나 다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일하면서 틈틈이 네이버 부동산을 뒤졌다. 그리고 전혀 다른 동네에 올라온 전세매물을 발견했다. 좋은 위치의 오래된 아파트가 올수리 중이라고 되어있었다. 바로 부동산에 연락을 했고 다음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집을 보러 갔다.


그 집은 말 그대로 올수리 중이었다. 도배, 장판은 모두 뜯겨 있었고 싱크대도 뜯겨있었다. 새로 수리해놓은 곳이라곤 화장실과 베란다뿐이었는데 새로 타일을 붙여 하얗고 깔끔한 화장실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문짝들도 모두 밝은 우드톤으로 교체가 되어있었다. 이미 수리가 된 부분들이 이렇게 깔끔하니 도배나 장판, 싱크대와 같은 빌트인 가구들도 괜찮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믿음이 생겼다. 게다가 위치도 좋았는데 바로 옆에 공원과 도서관이 있고 맛집거리와 카페거리가 가까운 떠오르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외진 아파트였지만 주변이 개발되면서 새 아파트들 사이에 자리하게 된 저렴하고 위치좋은 아파트가 되었던 것이다.


 부동산 아저씨는 먼저 연락 온 아가씨가 있다며 주말에 계약하지 않으면(보러 간 날은 금요일이었다.) 이 집을 놓칠 것이라고 했다.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섣불리 계약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주말엔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토요일날 계약하자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애매하게 대답했다.


"주말에 계약하는 사람이 없으면 월요일날 와서 제가 계약할게요!"


그렇게 나는 월요일날 전세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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