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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 Sep 27. 2019

든든한 아내로 사는 서글픔


   

남편은 남자다. 내 남편이 한 일을 모든 남자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슷한 글이 쏟아지는 걸로 봐서 남편들=남자들로 봐도 무방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작년에 Daum 브런치 글 "왜 남편은 내 편이 아닌가"(필자 이시스)를 ‘정말 당신의 심리도 그렇소?’ 확인하고 싶어서 보여줬었다. 남편은 자긴 공감이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 공감이 안 될지는 몰라도 그가 한 행동은 판박이였다. 그 증거는?    

7월초 장마라고 비가 추적추적 계속 내리고 전날부터 많이 온 비가 군데군데 고여 있었다. 아빠네 양재동에서 우리 집으로 오는 길에 제일 바깥 차선으로 가던 우리 차는 자꾸 촤악 촤악 물을 튀기며 달렸다. 중3 아들은 뒷자리에서 학교 가는 길에 차가 지금 우리 차처럼 촤악 물을 튀기며 지나가는 바람에 우산으로 물을 막았는데도 머리가 물로 다 젖었었다며 그때 일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는지 퉁퉁댔다.     

나는

"와, 그 운전자 매너 없네. 인도 옆 지날 때는 안 튀게 천천히 가야지."

남편은 

"뒤차 때문에 속도 줄이기 힘들 걸? 안 튀려고 속도 줄이면 잘못하면 사고 나."

핀트가 안 맞기 시작한 느낌으로 답답했지만 다시 나는

"옆에 사람 지나가는데 뒤차도 줄여야 할 상황이구만. 그 차가 줄이고 뒤차도 줄이고 줄줄이 줄여야지."

남편은

"물 안 튈 정도로 속도 줄이려면 엄청 천천히 가야해."

그래서 천천히 안 가겠다는 건가? 욱, 치밀어 올랐다.

"당연 천천히 가야지. 학교 가는 길인데 스쿨존이잖아."

남편은(여기서 남편은 멈췄어야 했다.)

"그럼 단속을 세게 해야겠네." (그러지 않으면 줄일 리가 없다는 듯)

드.디.어. 나는 화난 목소리로 퍼부었다. 이럴 때 내 목소리는 엄청 캬랑캬랑해진다.

"이거 봐. 이거 봐. 어제 읽은 ‘남편은 왜 나의 편이 아닌가’에서 공감 안 하고 정의의 화신, 독립투사처럼 군다는 내용이랑 지금 똑같잖아. 애가 물 튀어서 기분 나쁘다는데 그냥 공감해주면 되지. 왜 엉뚱하게 운전자 편을 들어. 속도 줄여서 사고가 나든, 단속을 세게 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냥 내 식구 편 들어주면 안 돼?"

“......”    

안 되나보다. 도저히 안 되나보다. 매우 공정하고 정당하고 객관적으로 도로 상황과 교통 흐름과 운전자의 심리까지 통째로 보는 넓은 시야를 가진 남자. 그런 사람으로서 개인적, 가족적, 감정적인 일에 편을 들고 나서면 엄청 나게 큰 일이 일어나나보다. 됐다 그래. 이럴 때 우리 엄마가 자주 썼던 말이 딱이다.

“앓느니 죽지.”    

재작년인가 스웨덴에 갔을 때도 그랬다. 왕궁에서 마침 교대식을 하길래 구경하기로 했다. 근위대가 들어오고 나가는 동선에 방해받지 않도록 관광객을 고기 몰 듯 제복 입은 남자가 저기로 가라고 와서 우리를 몰았다. 가라는 데로 가고 있는데 내 등을 세게 미는 것이 아닌가. 그냥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키면 되지 밀긴 왜 밀어? 기분이 나빴지만 가라는 데로 갔다. 그런데 아까 그 제복 입은 남자가 또 나를 뒤에서 밀었다. 들고 있던 장갑이 툭 떨어져서 주우러 가는데 너무 불쾌해서 “왜 밀어요~”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남편이나 아들은 그걸 보고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이다. 그게 더 화가 나고 서운해 점심 먹으러 들어간 피자집에서 꿍하니 아무 말 없이 밥만 먹고 나왔던 기억이 있다. 어쩜 멀리 외국에 가서 체격도 건장한 남자한테 자기 아내가 장갑까지 떨어뜨릴 정도로 세게 밀렸는데 보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할 수가 있지? 이 남자를 믿고 살아야하는 내 신세라니... 착하고 내가 하자는 것에 군말 없이 맞춰주고 나쁜 짓 하는 거 없는 남편을 두고 배부른 소리라 할지 모르지만 든든한 아내(남편은 내게 든든하다고 한다 너무 싫다)로 사는 게 참 서럽고 슬픈 건 어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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