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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 Dec 18. 2019

숱 많은 곱슬머리의 비애


  

긴 머리 여자의 뒷모습 클로즈업. 손가락을 목선 끝 머리카락 사이에 넣어 스윽 아래에서 위로 흩뿌려주면 부드럽고 윤기 있는 생머리가 찰랑~ 맑은 소리가 날듯 흔들린다. 원피스를 입고 바닷바람에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백사장을 걸어보는 게 꿈인 적이 있다.

나처럼 곱슬에 보통 사람의 두세 배 정도로 숱이 많고 굵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에겐 실로 매직스런 일이 미용업계에 일어났다. 그 이름 스트레이트 펌. 플라스틱 판에다 약 발라 머리카락을 붙여 놓았다가 얼마의 시간 후 하나하나 떼어내서 완성했던 펌이 개발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새 세상을 만난 듯 기뻤다. 머리를 뒤로 묶지 않고도 다닐 수 있어서다. 물론 내 머리는 복원력이 엄청나서 아무리 얇게 머리카락을 떼어내서 약을 듬뿍 바르고 시술해도 막 머리하고 나온 곧고 찰랑거리는 상태는 일주일 만에 사라진다. 기술 발전은 멈추지 않고 '매직 펌'이라고 불리는 시술이 나왔는데 납작한 다리미 같은 열판에 머리카락을 끼워 빗어내리 듯 하고나면 '스트레이트 펌'에는 비할 데 없이 한껏 찰랑거릴 수 있었다. 찰랑의 유효기간도 좀 더 길어졌다.     

스트레이트 펌이란 걸 상상할 수도 없던 88년에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중학교 때까지는 머리를 길게 길러 늘 하나로 묶고 다녔는데 커트나 단발은 할 수가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붕~ 떠서 뻗쳐올라 인순이나 티나터너의 머리가 됐기 때문. 머리를 막 감고 나와 축축할 때가 제일 정상적(?)이었다. 마르고 나면 다시 붕~. 태어났을 때의 나는 거의 대머리로 머리카락 한둘이 솟은 정도여서 숱 많아지라고 돌 때 머리를 빡빡 밀었다고 한다. 그 후로 새로 머리카락이 나면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한번 밀었다고 누구나 나와 같다면 이건 획기적인 대머리 치료법이 될 텐데... 내 머리카락은 어떻게 된 걸까? 바리깡 부작용일까? 뒤로 묶고 다니면 편하고 여름엔 시원하다. 하지만 묶은 자리가 간질간질 거리고 숱이 많아 무겁고 고무줄 묶은 자리는 땡겨 아팠다. 위로 묶었다 아래로 묶었다 자리를 바꿔 가며 견뎠다. 고등학교에 배정이 되었는데 전통을 자랑하는 K여고였다. 나는 칠십 구회 졸업생이었다. 교복은 잠깐의 자율화 시절이지만 머리는 전통이라고 몇십 년 전 규정을 지키고 있었는데 귀밑 삼 센티였다. 그러면 나는 삼각김밥 모양의 머리를 하고 다녀야 했다. 학기 초라 신입생에게 학교 규정을 전달하고 본격적으론 적용되기 전이었는데 학교엔 나보다 곱슬기가 더 심한 아이가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다. 가서 물어보니 학생부에서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도 그러면 되겠네.’ 

금요일 오후, 교무실 학생부를 찾아 젤 높아 보이는 넓은 책상에 앉은 선생님에게 다가가 물어봤다. 마뜩찮은 표정으로 ‘머리를 풀은 채로 있으면 어떤 상태인지 보게 머리를 감고 월요일에 교무실로 와보라’ 했다. 월요일 아침, 나는 머리를 최대한 부풀려 말린 후 묶지 않은 채로 미친년 산발을 하고 ‘이래도 풀고 다니라고 하겠어?’하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등교하자마자 교무실 문을 빼꼼 열었다. 선생님들 회의 중이니 밖에서 기다리라는 말에 복도에 서서 끝나기를 한참 기다렸다. 머리를 풀러 헤쳐 산발을 하고 있는 나를 복도를 지나는 애들이 흘낏흘낏 쳐다보았다. 우르르 나오는 선생님들 중 학생주임을 좇아가서 말했다. 

“저, 머리 풀고 오라셔서 풀고 왔는데요...”

학생주임은 나를 데리고 학생부 선생님들이 앉은 자리로 갔고 아침마다 같이 매서운 눈으로 교문을 지키던 단단한 체구의 교련 선생에게 

"얘, 두발 허용해주죠."

"선생님, 진짜 허용해주실 거예요?"

"그래야지요 뭐, 저러는데."

교련 선생은 올라간 눈썹을 더욱 올리며 못마땅한 듯 물기 없는 말투로 내뱉었다.

"저런 애들은 근성이 나빠."    

'근성이 나빠, 근성이 나빠, 근성이 나빠.' 귓전에서 메아리쳤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그 말이 자꾸 생각나면서 속에서 열불이 올라왔다. ‘근성? 뿌리부터 안 좋다는 거야? 내가? 왜? 지가 뭔데 나한테 근성이 나쁘대? 뭘 보고 근성이 나쁘대? 숱 많은 곱슬머리인 게 죄야?’ 고등학교에 올라가 선생님한테 처음 듣는 말이 ‘근성이 나쁘다’라니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초지종을 들은 엄마는 정성들여 편지를 쓰더니 봉투에 넣어 나에게 주었다.

"이거 내일 선생님 드려. 네 사정 편지로 썼으니까 이해해주시겠지."

하얀 편지봉투를 들고 다음날 아침 교련 선생에게로 갔다. 편지를 내밀었는데 교련 선생은 손사래를 치면서 받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엄마가 쓴 편지도 안 읽어보겠다는 거야?' 화가 났다. 그러나 안 받는다는 걸 억지로 읽힐 수도 없어서 다시 들고 왔다. 집에 와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성이 나쁘다는 말은 내게 더러운 오물 세례로 끼얹어졌다. 그때의 느낌은 삼십 년이 넘은 지금에도 떠올리면 생생히 살아난다. 나는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느냐’고 따져 묻지 못했다. 따지기는커녕 어떤 힘에 눌려 말 한 마디 대거리를 못했다. 오히려 교련 선생이 감탄할 만큼 성실하고 괜찮은 아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너무나 열심히 교련 시험공부를 하고, 붕대감기 실기 연습을 몇 시간이고 거듭했다. 나를 존중하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몰랐다.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썼구나 생각하니 분하고 억울하다. 무지막지한 힘에 끽소리 못하고 순응했던 여고시절 나의 억울함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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