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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 Apr 30. 2020

무지한 동침

 

나는 첫사랑과 결혼했지만 한 사람 하고만 키스를 한 건 아니다. 키스를 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결국 익숙한 질감의 입술에 안착하기로 한다. 오랜, 익숙한 편안함.


이 편안함을 얻기까지는 어떤 일들이 있었나 기억을 되짚어 본다. 나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무지함과 자기 중심성에서 나온 태평함으로 무사하고 안전하게 첫 동침을 한다. 글자 그대로 같은 이불에서 잠을 잔 것이지 거기엔 어떠한 은유도 없다.


사건의 전말은 내가 보기에도 어처구니가 없다. 스펙터클한 로맨스를 좋아한다면 더 읽지 말기를 바란다. 인생이 의외로 시시하다는 걸 아는 어른이라면 물에 술 탔는지 술에 물 탔는지 감식안을 기대한다.    


나는 91년도에 대학에 들어갔다. 어느 시대였어도 대학 신입생이라면 조금은 가슴이 부풀기 마련이다. 학생회실과 동아리실이 한 건물을 다 차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고 멋지다는 생각을 하며 둘러본다. 그러나 수십 개의 다양한 동아리 중에서 '실용한자 연구회'라는 곳으로 제 발로 들어간다. 팔팔하고 에너지 뻗치는 대학 신입생이 특별히 꼬시는 선배도 없이 고른 곳이 웬 실용에다 한자 연구회란 말인가. 나는 특이하게 굴고 싶은 걸까? 초등학교 때 술술 잘 외워졌던 순조로운 느낌이 그리운 것일까? 과거의 내가 왜 그런 건지 나도 이해할 수 없다.    

신입생이니까 적당히 반겨주는 환영을 받고 몇 번 들락날락해보아도 실용한자 연구회에선 한자 연구를 하진 않았다. 통기타를 치며 거들먹거리는 남자 선배와 거기에 맞춰주며 쩔쩔매는(걸로 보이는) 다른 선배가 있는데 어리숙한 내 눈에도 둘 다 찌질해 보인다. 게다가 나는 예상과 다른 일이 펼쳐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자 연구회에서 웬 통기타?


동아리의 껍데기를 쓰고 있으므로 실용한자 연구회에서도 엠티라는 걸 간다. 한창 동아리 엠티 철인데 동아리 맘에 안 든다고 갑자기 다른 데 들어가 엠티에 낄 수도 없고.(그런 주변머리가 내겐 없다) 과에서 하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이후로 첫 여행이라 집에다 당당히 허락을 받고 옷가지를 넣은 배낭을 메고 동아리 원들과 버스에 오른다. 가다가 뭔가 이건 아닌데... 싶은 찝찝한 느낌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대학 와서 첫 엠티인데 저 사람들과 같이 가면 엄청 재미없게 지내다 올 것만 같아, 어쩌지?' 불길한 예감은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우리 집은 너무나 고루하고 엄격하며 나는 너무나 순종적인 스타일’로 설정된다. 신데렐라처럼, 놀다가 통금에 늦지 않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기엔 엠티 장소가 너무 멀어 나는 가던 버스에서 내리기로 한다. 탈출에 성공하니 정말 홀가분하다.


공식적인 외박이라 그대로 집에 가긴 억울한 느낌. 그 길로 과 학생회실에 가서 나는 만나는 선배마다 붙잡고 '외박을 허락받았으니 오늘 밤 나를 책임져 달라'라고 한다. 뭘 믿고 무슨 배짱으로 그런 망발을 한 건가. ‘여자애가 세상 무서운 줄 몰라’라는 흔한 말을 아무에게도 듣지 않은 채 밤은 깊어간다. 그날 밤에 나와 밤을 보내며 함께 있어줄 선배로는 까마쥐라는 87학번이 당첨된다. 집이 지방이고 하숙집엔 들어가도 안 들어가도 잔소리할 사람이 없는 자유인인 것이다. 게다가 그날 약속도 없는 한가한 사람, 식물성으로 생긴 인상 좋은 웃음을 웃는 사람. 파릇파릇한 대학 1학년 여자 후배의 당돌함을 감당할 사람.


모처럼 통금 걱정도 없이(국가 통금은 없어졌어도 집 통금은 남아있는 비민주 가정에 살던 나. 게다가 저녁 아홉 시 통금이 웬 말. 부모들이여, 딸을 너무 죄면 이렇게 엉뚱한 곳으로 샌다!) 술도 먹고 얘기하며 실컷 논다. 까마쥐는 그다지 재밌는 선배가 아니다. 그날의 조건에 맞는 만만한 자일뿐. 특별한 날인데도 그날의 대화 중 추억으로 남은 건 낫띵. 그래도 좋다고 생맥주 오백을 시켜놓고 너덧 시간 앉아 별 재미도 없는 얘기를 하다 보니 피곤해진 나는 자러 가기로 한다. 까마쥐 선배를 따라 들어간 곳은 학교 근처 여인숙. 방만 달랑 있고 화장실, 세면대가 밖에 공동으로 쓰는 시설인데 뭘 알았더라면 그런 곳엔 묵지 않고 도로 나와야 한다. 처음이니까 원래 다 그런 줄 안 나는 발 씻으려고 공동 세면장에 갔다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아줌마를 봤다.  '왜 저렇게 봐? 기분 나쁘게.' 속으로 툴툴대며 방에 들어간다. 방엔 둘이 자야 하는데 요가 달랑 하나, 이불도 달랑 하나다. 나는 당황하지 않는다. 불편하게 붙어서 자야 하네, 하는 생각뿐. 그것도 원래 그런 줄 안 모양인데 원래 그래란 없다는 걸 사십이 넘어야 알게 된다. 둘은 나란히 딱 붙어 누워 쿨쿨 자고 다음날 집엘 갔는지, 바로 학교로 갔는지 기억조차 없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무미건조한 여인숙의 밤이었나? 열심히 열심히 기억의 테이프를 감아본다. 아, 아침에 잠에서 깨 일어나려는 내게 선배가 묻는다. 한번 안아줘도 되냐고, 평소에 너무 이쁘게 굴어서 칭찬해주고 싶었다나? 나는 선배가 만든 통일 소모임을 한다. 실용한자 연구회도 모자라 통일 소모임이라니 나는 왜 이리 딱 봐도 재미없어 보이는 곳에만 들어가는지... 다음 생에 태어나면 댄스 동아리나 스카이다이빙 동아리, 아무튼 이름만 들어도 신나고 재밌을 거 같은 곳에 가리라고 이날을 떠올리며 마음먹게 된다. 나는 선배가 읽으라는 책을 읽으라는 날짜까지 꼬박꼬박 읽어 와서 세미나에 성실히 참여하는 새내기다. 아마 숙제를 꼬박꼬박 하던 고등학교 때 습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시절이어서 그런가 본데. 그게 선배로서 이뻐 보였나 보다고 스스로 인정하면서 안아주고 싶다면 그래 보라고 선선히 허락한 것이다. 쿵쾅대는 선배의 심장소리를 무덤덤히 들으며 어색한 잠시의 시간을 가졌던 게 무지한 동침 사건의 전말이다.


그로부터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같은 이불속에서 자는 그날의 남자에게 얼마 전 나는 물었다. 그때 같이 자면서 어떤 마음이었냐고.    


"엄청 참았지. 참느라 한숨도 못 잤어. 근데 네가 나를 믿고 따라왔는데 고이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역시 부부는 신의로 맺어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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