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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 Jun 06. 2020

아직은 마흔아홉

화사한 마음이 아직 남아있다고

몇십 년 만에 갑자기 1킬로미터 달리기를 하니 지쳐서 낮에 널브러져 있다가 저녁으로 라면을 끓여 겨우 먹었다. '건강해지겠다고 헬스장을 다니면서 몸에 안 좋은 라면이라니'와 '기운이 없는 걸 어떻게 해' 사이를 오가며 누웠다가 생각이 튀었다. 아침에 헬스장 트레이너가 체력 측정 양식에 내 기록을 적어 넣으며 묻던 기억이 난 것이다.

"회원님, 몇 살이세요?"

나는 살뜰한 만 나이로 계산하여 마흔일곱이라고 대답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와, 우리 나이로 아직 마흔아홉이지만 내년이면 쉰이잖아?'


<아직은 마흔아홉>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던 거 같은데...싶어 검색해 보았다. MBC 아침드라마로 1990년 10월 15일에 시작해서 1991년 2월 16일에 막을 내린 무려 106부작이었다.

김혜자, 정혜선 주연. 기획의도를 보니 '6.25와 4.19를 체험하고 어느덧 50세를 앞둔 두 여고 동창생의 인생을 통해 중년 여성의 삶의 기쁨과 갈등을 그림.' 위키피디아가 말해 주었다.


왜 제목이 '아직은' 일까? 짐작되는 바가 없진 않다. 마흔이 넘었을 땐 인생의 전환기에 들어섰다는 기대가 있어 동갑 친구들과 마흔 기념 제주 여행도 갔는데, 쉰이 넘은 나이는 느낌이 영 다르다. 여름날 두부처럼 쉬어버리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마흔으로 진입하기 직전에도 알뜰하게 만 나이 계산을 하곤 했다. 현재 연도에서 태어난 해를 뺀 후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다시 일을 빼면 마흔까지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이 되었다.

드라마 주인공 김혜자, 정혜선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마흔아홉이면 저런 이미지인가? 놀랐다. 한복에 틀어 올린 머리를 하고 활짝 웃는 두 여자가 내 또래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공교롭게 드라마 촬영 당시 실제 나이가 마흔아홉이었다는데.


나는 최근 노후 준비로 친구들과 함께 살 동네 땅을 보러 다녀왔다. 모여 살면서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나누며 웃고 살자고, 아프면 서로 돌봐주며 살자고 모의 작당을 했기 때문이다. 늙으면 죽게 될 것이니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존엄한 죽음, 시신 처리에 이르기까지 같이 책을 읽으며 미리 생각해 보았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삶을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한창나이인 쉰에 대한 직관적 이미지는 긍정보다는 부정으로 기울어 있다. 무엇을 피하고 싶은 걸까?

문득 유쾌 발랄한 사노 요코 할머니라면 혀를 쯧쯧 차며 허를 찌르는 한 마디를 날려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책꽂이에서 <사는 게 뭐라고>를 집어 훑어보았다. 자신이 이제 더 이상 화사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얘기가 적혀 있었는데 너무 늙어버린 말 같아서 마음에 안 들었다.


퇴근한 남편에게 중국 드라마를 보느라 아이패드로 빠지기 전 물어보았다.

"사십일 때랑 오십일 때랑 너무 기분이 다르지 않아?"

"그렇지. 오십이 되면 더 이상 아직 젊다고 얘기할 순 없잖아. 오십 넘으면 아무래도 인생의 반은 넘게 산 거니까."

그런가? 어쩐지 설득된다.


교사 임용고사를 같이 공부한 스터디 모임 친구들 단톡에도 말을 던져보았다.

"우리 이제 곧 오십, 사십과는 느낌이 너무 달라."

"응. 팍 늙었어. ㅠㅠㅠㅠㅠㅠ."(세상에 ㅠㅠ가 세 번이다)

"나 온라인 수업 때매 목디스크 왔다고 했어?"

우리 몸은 이제 조금만 무리하면 '나를 돌봐라.'하고 비명을 지른다. 그래도 난 종종 '화사한 마음'이 드는데... 계절이 바뀌면 설레고 특히 봄의 여린 연둣빛에 자주 감탄한단 말야. 유월의 짙푸른 녹음과 화려하게 피어나는 들꽃을 보고 화사한 마음이 들지 않는 나이가 있나? 로맨스 없이도 살짝 들뜨고 기분 좋게 그리운 우정도 떠오른다. 사노 요코처럼 예순이 넘으면 그마저 없어지는 걸까? 사노 요코는 화사한 생명이 생기지 않는다며 그게 오히려 편하다고 했는데 난 어쩐지 아쉽다. 할머니 돼서 죽을 때까지 화사한 생기를 안고 죽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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