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 외향을 가르는 나만의 기준 / 경기광주중앙고 2학년 김승은
학교 생활을 하다 보면 자주 오해를 받는다. 내가 외향적인 사람일 거라는 오해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쉬이 친근하게 다가가는 내 모습에 “너는 당연히 외향적이지.”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 외향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릴 적 나는 반에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조용한 아이였다. 그때는 아이들이 자신과 잘 맞을 만한 친구를 골라서 사귀기보다는 일단 친해지고 보았기 때문에 친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학년이 바뀌면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친구, 말수가 적은 친구보다는 활발하고 사교적인 친구를 더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성격을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원성격을 온전히 고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소심했고 예민했다. 좋게 말하면 남들에 대해 깊게 생각했고 눈치가 빨랐다. 그다음 해, 4학년이 되고 용기를 내서 먼저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한 번 해보니 그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물꼬를 튼 대화는 많은 친구를 사귀는 싹이 되었다.
이후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점점 더 활발히, 사교적으로 변하는 내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한창 사춘기가 왔을 때는 내 마음과 달리 산다고 생각해서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기운 빠진다는 느낌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결국 말 많고 시끄러운 모습도 ‘나’이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것도 ‘나’인 것이다.
간혹 사람들은 내향적인 사람을 자기표현을 못 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내향/외향의 차이는 표현력의 영역이 아니라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의 차이이다. 다양한 친밀도를 가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가 좋다면 외향적이고, 소수의 친한 사람들 또는 홀로 있을 때가 더 좋다면 내향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내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성격 재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우리나라 특유의 ‘퉁치기’ 문화가 작용한 것도 있다. 리퀴드 립스틱을 틴트로 퉁치는 것처럼 사실은 외/내향에 관계없는 부분들임에도, 그것들을 끌어와서 그 성향의 소속된 사람들의 특징으로 묶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향적 임의 본질은 사라져 버렸고, ‘친구가 적은 사람은 다 내향적이다.’ 내지는 ‘자기표현을 못 하는 사람은 내향적이다.’라는 인식이 생긴 것이다.
그에 따라 내가 발표나 토론을 좋아한다고 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불편함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외향적이라는 판단을 듣는 것이다. 소심하지만 외향적인 사람, 친구는 적지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은 지워져 버렸다.
이러한 행태가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판단 기준은 조금씩 다를 수 있고, 그에 따라 다르게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판단의 내용이 자신을 제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말해 낙인효과로 작용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아, 나는 내향적이라 발표는 어려워.., ‘나는 외향적이라서 책 읽기 숙제는 싫어.’ 등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설정하는 데에 있어 자신의 특성이 작용되지 않길 바란다.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믿고 일단 해보기를 추천한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다.
TMI로 스스로 임기응변 능력이 높구나 라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친구들과 놀러 지하철을 타러 간 날이었다. 친구들끼리 역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오셨다.
“교회 다니니?”
“네. 여기 다 교회 친구들이에요.”
사실 우리 중 교회에 다니는 친구는 단 1명이었다.
“마스크 쓰고 손 씻는 것보다 기도하는 게 더 중요해.”
“맞아요, 저희 교회에서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아마 사이비 계통이었을 것이다. 신천지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대화 후 어디 교회 다니냐고 물으시길래, 대충 시내 쪽에 있다고만 답했다. 이런 임기응변도 사회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조금 더 고민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