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 Nov 30. 2020

여름을 훔쳤다

광주중앙고 2학년 김혜민 씀.


8살쯤이었다. 여름의 햇빛은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바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더운 날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나는 송골송골하게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티브이와 선풍기를 켰다. 티브이를 틀자 며칠 전에 한 호빵맨이 시끄럽게 흘러나왔고, 요란스럽게 돌아가는 선풍기는 더위까지 날려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눈길을 돌려 창문 밖에 있는 놀이터를 내려다봤다. 놀이터에 친구들이 나오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옷장을 열었다 닫았다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문득 집 앞의 문방구가 생각났다. 나는 문방구에 파는 500원짜리 풍선을 사기로 마음을 먹고 1000원 지폐 한 장을 들고 집 밖을 나섰다. 학교가 끝난 뒤의 거리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그 고요함을 뚫고 문방구에 도착했다. 문방구엔 학교가 끝났지만 고무 딱지를 사는 남자애들과 불량식품을 고르는 친구로 붐볐다. 나는 그 친구들의 사이로 내가 찾던 풍선을 잡았다. 그리곤 밀물이 빠져나가듯 친구들이 우르르 나갔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같이 떠밀려 나왔다. 난 오른손에 쥔 풍선을 갖고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은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나뭇잎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풍선 덕분인지 발걸음도 이상하리만큼 가벼웠다. 그러나 집 앞에 다다라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바람이 선선하게 분 까닭은, 발걸음이 가벼웠던 까닭은 내가 그 풍선을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평소 같았으면 다시 돌아가 계산을 하고 왔을 테지만,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내 마음을 간질인 걸까. 나는 나쁜 생각을 하게 됐다. 서둘러 계산이 안 된 풍선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닫힘 버튼을 계속 눌러댔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 거실에 멍하니 서 있었다. 괜히 창문으로 놀이터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나는 티브이를 다시 틀었다. 티브이는 아직까지 하고 있는 호빵맨이 여전히 시끄럽게 흘러나왔지만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책상 위에 올려놓은 풍선에 눈길이 갔다. 

'내가 훔치려고 훔친 건 아니잖아' '문방구에 사람이 너무 많았어' '아무도 안 봤겠지' 

나는 풍선을 집어 들었다. 풍선을 빤히 쳐다보곤 이내 다시 내려놨다. 갑자기 잠이 파도처럼 몰려와 나를 덮쳤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땐 오빠가 티브이를 보면서 계산이 안 된 풍선을 불고 있었다. 나는 이 일을 나만 알고 있기로 마음먹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문방구 앞을 지날 때마다 괜히 주춤거리게 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 나침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