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김민주 학생
공부의 의미에 대하여
나는 공부가 싫다. 매일 같이 일찍 일어나 등교하여 책상에 들러붙어 하루를 보내야 하는 그 일상이 정말로 싫다. 여기서 알고 가야 할 것은 내가 싫어하는 공부란 대학교를 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뜻하는 것이며, 나는 특정한 학문을 배우는 일 자체엔 거부감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고등학교의 교육과정도 하나의 학문이라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분야에도 전문가가 존재하고 교과서라는 책을 통해 내용을 정리하고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내가 흥미가 없는, 배워도 그만 안 배워도 그만인 것에 관한 공부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디자인을 전공하는 미술 대학교에 진학하여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면서 많은 사람과 내 생각이 담긴 창작물을 나누며 함께 재미와 행복을 느끼고 싶다. 그렇게 줄곧 그림을 즐기는 걸 업으로 삼고 싶다. 흔히 이상론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상론이라도 믿고 싶은 사람이다. 그 이상론에는 학문에 관한 나의 철학도 담겨있다. 나는 내가 최대한 좋아하는 것, 관심 있는 것을 하며 살고 싶다. 이 삶의 모토는 학문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크게 알고 싶지 않은 것을 꼭 알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따로 배우고 익히면 된다. 굳이 당장 하고 싶지 않은 일에 힘을 써봤자 관심도 없는 일, 어차피 다 까먹어버리고 결국에 내 노력은 허사가 된다. 그럴 바엔 필요한 건 필요할 때만, 영구적으로 배우고 싶은 건 배우고 싶은 만큼 그대로 정진하면 되는 게 아닌가. 무조건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는 교육과정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왜 그렇게까지 비효율적이야 하는가? 왜 그 비효율적인 수단을 모든 학생에게 끊임없이 강요하는가? 몇몇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필요하지 않은 건 하지 않고, 필요한 것은 꾸준히 하며 잘만 살아간다. 전과목에 능통한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오히려 강요를 받는 공부일수록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잠깐 내 중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이때까지 오로지 강요에 의한 공부를 해왔고, 결과도 강요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나는 수학을 싫어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초등학생 때 다닌 학원에서 맞으면서 배웠다. 틀린 만큼 맞고,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꾸중을 들으면서 끝까지 문제를 풀어야 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혼자 화를 내기도 많이 냈다.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런데 중학교에 올라와서도 억지로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열심히 했다. 하루에 몇 시간을 학원에서 버티는 건 고역이다. 그것도 아주 싫어하는 수학을 풀어야 하는 것은 말이다. 성적은 그럴듯했으나 기뻤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강요받았으니까. 고등학교에 올라와선 그냥 놓았다. 내 입시에 지장이 없었고, 내 인생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판단에서이다. 놓은 후로는 마음이 편했다. 그동안 애써 외웠던 공식들도 설탕이 물에 녹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람은 자기 판단으로 삶을 살아간다. 당연하다. 나의 삶이니 내가 선택한다. 그런데도 이 당연한 권리를 방해하는 장소가 있으니 나는 그것을 감히 학교라 말하고 싶다. 나는 내가 배우고자 하는 것에만 노력하려고 한다. 바로 이 학교에서. 대학교에 진학하여 비로소 더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앞서 말했듯 내가 '공부'라는 것 자체에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배우고자 하는 학문이 있고, 내가 전공하려는 미술 또한 공부가 필요한 학문에 가깝다. 애초에 공부하지 않으며 알 수 있는 학문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니 내가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말은 나에게도 뜻이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해 머리를 쓰는 그 모든 것이 내 공부의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