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것,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보는 눈
사라진 것,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보는 눈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믿는가?
똑똑한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휩쓸리지 말고 멈추고 내 머리로 직접 생각해보는 번거로움을 기꺼워할 때 통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까다롭고 까칠하다는 평가를 기쁘게 받아들일 때 기존과 다른 생각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거나, 이것도 저것도 문제라면서 자신은 뒤로 빠지는 비겁한 연구자가 아니라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면서 용감하고 논리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 담긴 책을 읽었다.
야마시타 영애라는 이름에는 페미니즘과 정체성 고민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가 던진 문제의식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문제에 ‘페미니즘’ 시각이 필요하다는 걸 처음 생각하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에서 국가 공권력이 강제성을 인정하였으나 일본인 매춘부는 성노예가 아니라는 입장은 기존 가부장제 남성 중심 사고가 끼어든 것으로 ‘위안소’ 제도의 본질적 문제를 흐린다는 주장에 무릎을 쳤다.
연구자 야마시타 영애는 문제 제기하는 사안의 한 가운데에서 운동을 해오고 있으며 국민기금(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 수령을 둘러싼 논쟁에서 정대협 내부에 있으면서 정대협 인식의 한계를 정면으로 다룬다. 생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중요한 것과 곁가지를 가려낼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으며 페미니즘 시각에서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고, 펼치고, 자기 의견을 분명하게 밝히는 태도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기존 논의를 넘어서는 관점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권은선은 영화 ‘귀향’ 관람 경험이 갖는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밝혀 영화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제작됐으나 가해자의 시선으로 성폭행을 묘사함으로써 ‘사라진 것들’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죄책감으로 전도된 가해자의 선명한 시선의 지배하에서 피해자의 시선은 말살되며, 최소한이 존엄을 추구하는 행위도 비명 이외의 언어도 모두 배제된다. 그럼으로써 지옥에서 최소한의 존엄을 재현할 가능성도 선명한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는 주장이 여성의 인권 유린을 소재로 한 영화의 장면들에서 관객으로서 내가 겪는 반복적인 불쾌감의 정체를 분명하고 속시원하게 알게 해 주었다. ‘귀향’에 관한 주장을 읽다가 떠올랐다. 5.18 국가폭력을 최초로 다뤘다는 영화 ‘꽃잎’(1996년작)이. 극 중 문성근 배우가 이정현 배우를 학대, 강간하는 장면을 봤을 때 내가 느꼈던 불쾌감은 단순히 폭력에 대한 저항감이나 분노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야마시타 영애나 권은선이, 무엇을 표현함으로써 ‘사라지는’ 중요한 것을 볼 줄 알고 힘주어 이야기하는 동안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왜 핵심인지를 밝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평화의 소녀상이 상품화되는 과정에서 ‘위안부’로부터 섹슈얼리티, 본노, 고통 등 모든 불편한 요소가 삭제된다는 허윤의 문제의식이나 공창과 위안부 비교 문제를 짚으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를 다룰 때 역사 진공상태에서 ‘강제’와 ‘자발’을 구분하는 한심한 노력을 찌른 박정애에게서도 같은 궁금함과 존경심이 우러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이 책에서만큼 다각도의 연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된 반가움과 페미니즘 시각에 의하지 않고는 일본인 위안부냐 조선인 위안부냐를 가르는 편협하고 무식한 짓을 하게 되거나 공동체의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사건에서 피해자의 시점, 언어, 말하기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이야기하지 않는 결정적 결핍을 만들어내는 거구나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