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모_생활글쓰기(3기) 마지막 수업 후기
이번 글 주제는 '다시 돌아 사랑'이었다.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장면이 여럿 생각났지만 많아서 뭘 집중해서 써야 할 지 오히려 어려웠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쓸 지, 내 사랑의 역사를 쓸 지, 내가 최근에 발견한 사랑에 대해 쓸 지,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서 가장 마지막엔 사랑이란 사실에 대해 각잡고 쓸 지를 정할 수가 없었다. 뭐 하나 뾰족한 게 없다는 말도 됐다.
같이 수업 듣는 선생님들 글을 읽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부드럽고, 촉촉한 감각을 건드려주는 글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함께 한 달에 한 번 글을 나누며 다채로운 빛깔에서 사유의 깊이에서 많이 배우고 자극을 받았더랬다. 뭣보다 어떤 글을 쓰든 다 좋다며 어떻게 좋은 지 조목조목 밝혀주는 윤경희 선생님의 칭찬의 말 속에서 맘껏 시도하고 까불 수 있었다. 선생님도 나도 수강생들의 글을 꼼꼼히 읽고, 나는 느낌과 배움을 댓글로 남겼다. 마무리 소감을 들어보니 자기 글을 읽어주는 사람의 존재가 글을 쓰게 하는 동력이란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글을 쓰는 과정은 사람을 뭔가 조금씩 변하게 하는 것 같다. 책 읽기 전과 후가 달라야 의미가 있듯, 글도 쓰기 전과 후는 뭐라도 달라야하지 않겠나(아니어도 별 수 없고)
이번 글에는 여러 사람이 거칠게 담겼다. 더 공들여쓰면 좋겠지만 적당히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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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하다 보니 자꾸 더 하게 되는 것
작년 겨울 12.3 계엄 이후, 나는 분노의 에너지로 광화문에 갔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니, 누군가 가져온 빼빼로를 옆으로 옆으로 전달해 왔다. 조금 놀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따끈한 백설기가 어디선가 넘어왔다. 화장실 가느라 왔다 갔다 하다 나무 아래에 핫팩이 가득 든 상자를 봤다. 겉면에 ‘필요한 분은 가져가시라’라고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다 낯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화장실에 가니 거울 구석에 뭔가 차곡차곡 담긴 상자가 보였다. 생리대였다. 와, 이런 섬세한 센스라니, 감탄했다. 집회가 거듭되자 광장에 직접 오지 못해 미안하다며 집회 장소 근처 카페에 선결제를 해두고 음료 나눔을 한 통 큰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게 한둘이 아니었다. 어묵 차를 통째로 보낸 사람도 있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사랑이 곳곳에 들어찼다. 그 자리에 나가게 한 건 분노였지만 오래 머물게 한 건 사랑이었다. 나는 나 먹을 간식과 내가 쓸 핫팩만 달랑 가져 갔는데... 사랑을 거침없이 표현한 사람들이 커 보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사랑이 없는 사람 같다. 교사가 되고 난 후에는 그게 큰 결격 사유로 느껴졌다. 힘든 학생을 보면 할 수 있는 내에서는 돕지만 애달프고 마음 아파 어쩔 줄 몰라 하는 마음이 되지는 않았다. 담임을 맡아서 애들이랑 좋기도 하지만 마음을 너무 쓰게 되어 해마다 겁이 난다는 선생님 얘기를 들으면 ‘그렇게 마음이 기울어지지는 않던데 나는 참, 사랑이 없는 사람인가 봐.’ 싶은 거다.
절친 중에 막강 사랑자가 있다. A의 말을 들으면 놀랍고 신기했다. 나한테 없으니 내 눈엔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동료가 퇴근하면 혼자 있게 되는데 무기력하게 있다가 밥 굶을까 봐 집에 가기 전 꼭 저녁을 먹여 보내고, 같은 교무실 선생님이 표정이 안 좋으면 괜찮냐고 놓치지 않고 묻는 사람이다. 학기 말에 ‘부장님 덕에 자기는 1학기를 겨우 살아냈다’는 문자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상상만 해도 뜨끈하고 말캉한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 같으니. 그런 A는 자기 고단한 건 기꺼이 감수하는 몸을 가졌다. 마음을 쓰다 보면 벅차게 기쁜 일도 있지만 얼음칼에 찔리는 시린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나는 마음이 격해지는가 싶으면 주춤 물러서고 얼른 다운시켜 평온을 되찾곤 하는데 이런저런 관계를 감당하려니 고통스럽다 하면서도 매번 자처하는 A가 대단하게 여겨진다. 이런 막강 사랑꾼 A와 비교하니 내가 더 사랑 없는 사람으로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상대적으로 빈곤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왜 사랑꾼과 비교하며 빈곤감을 느끼는 사람인 건가? 나는 사랑이 없는 것일까, 사랑 표현이 안 되는 것일까? 사랑 표현할 때의 어색함을 들키기 싫어 아닌 척하는 습관이 굳어진 건 아닐까? 이런저런 질문으로 생각이 툭툭 튄다. 나를 잘 알고 싶은 마음과 변호하고 싶은 마음을 섞어, 내 사랑 표현에 대해 고찰해보기로 한다.
다정한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전화했을 때 네가 ‘어’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하면 갑자기 하려던 말이 뭐였는지 까먹고 턱 막히는 느낌이 들어. 어, 라고 하지 말고 차라리 ‘여보세요.’라고 해줘.”
내가 자주 쓰는 ‘어’의 질감과 높낮이는 내 기분과 상대에 따라 달라지지만, 친구 전화에 대해서는 말랑하고 뒤가 높아지는 나 나름 다정한 톤이라고 생각했는데... 아, 충격. 남편에게 가는 톤은 좀 더 딱딱했을 텐데 어쩌지.
무슨 드라마를 본 건지, 어디서 얘기를 들은 건지 언젠가부터 남편은 애정 표현이 많아졌다. 출근하기 전에 꼭 “사랑해.” 해놓고 잠시 멈춤. 내 답을 기다리는 게지. 그럼 나는 “어, 그래.” 평조(平調)에 물기 없는 ‘어’다. 정답은 “나도 사랑해.”라는 걸 뻔히 알지만 말이 안 나오는 걸.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갓 구운 빵의 속살 같은 질감으로 말하고 싶다. 그런데 내 입술에서는 수분이 빠져 바스러지는 종이 조각 같은 문장이 떨어져 내리고 만다. (아, 이런)
그림책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해』(안 에르보)와 윤경희 교수님의 서평을 연이어 읽고, 과장이 얼마나 매력적인 행위인지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은 참이고, 그저 사랑한다는 단순하고 정직한 말로는 내 사랑의 커다람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도 참이다. 말이 모자란다. 언어의 궁지에 부딪쳐, 과장하는 자는 정직하고 객관적인 언술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다른 말들을 그러잡아 멀리 저 멀리 힘차게 던져 날린다. 폭죽처럼, 묶지 않은 꽃다발처럼, 다리에 금화 한 닢씩 매단 전서구 떼처럼.’
온몸에 감정이 흘러 넘치는데 자음과 모음 따위가 얼마나 허접하고 궁색한 도구로 느껴질지는 너무나 잘 이해된다. 내가 하느냐 마느냐와는 별개로. MSG 없이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게 편안한 나는 호들갑스럽게 과장되어 보이는 말과 행동에는 동참이 쉽지 않다. 어색하고 그게 너무 못 견디겠는 거다. 과장은 고사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조차 쉽지 않은 나에게 2011년부터 수정 업데이트 해오는 ‘사명서’가 있다. 작년에 십 년 만에 갱신했는데 열한 줄의 사명서 네 번째 줄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가족에게 사랑을 좀 더 의식적으로 표현한다. 나의 어색함보다는 가족이 얻을 기쁨을 먼저 생각한다.’
잘 실천해서 필요 없어진 내용은 갱신할 때 빼는데 ‘사랑 표현 결심’은 십 년째 그대로다. 난관은 어색함인가? 그러고 보니 어색함을 소재로 글을 쓴 일이 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어색하면 안 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라는 무리한 신념을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 어색한 감정이 들었는데 그게 너무 커서 내가 잘 다루지 못한다고 느낄 때,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 상태가 남에게 티 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다. 가령 신입이 많이 들어와 낯선 사람이 적지 않은 모임의 뒤풀이 자리에서 어색해하고 있으면 환영받지 못할 거라는, 더 나아가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있다는 걸 글을 쓰다 보니 알게 됐다. 게다가 그 감정을 빨리 처리하지도 못할 거라면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는 비합리적 믿음도. 그때 누구나 어색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럴 땐 그냥 그대로 있어 보기로, 아닌 척하느라 애쓰지 말기로 마음 먹었는데 아직도 그대로라니 작은 절망감이 또르르.
이런 생각도 한다. 성격이지. 사랑 부족이나 결여가 아니라 표현의 문제다. 표현이 왜 문제가 되냐, 사랑은 관계니까.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원하기 때문이다. 전화했을 때 다정하게 응대해주기를, 애정 표현에는 애정 표현으로 반응해주기를.
듣고 있을 때도 사랑 표현이 필요하다. ‘너에게 관심이 많아, 네 이야기가 나는 재밌어, 너랑 있는 시간이 좋아.’ 리액션이 큰 사람 옆에서 내 표현은 늘 미달하므로 여럿이 있을 때는 입 떼지 않고 바라보기를 선택한다. 미약한 리액션으로 애를 쓰기만 하고 상대를 만족시키지 못할 바에는 가만히 있는 게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파닥거리기만 하고 상대 심장에 꽂히지 못하는 화살을 쏜 내 모습이 볼품없게 느껴진다. 나는 속칭 ‘모냥 빠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구나. 상대 얘기를 듣는 순간에도 상대에게 온전히 집중하기보다는 나를 더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조금 부끄럽네.) 단둘이 있을 땐 태도가 조금 달라진다. 함께 하는 시공간의 공기에 대해 ‘책임’이 있으니까. 최선을 다해 텐션을 끌어 올린다. 이때는 상대의 만족도 보다는 리액션 여부가 더 중요하므로.
온라인 대화에는 나를 보완해주는 이모티콘이란 게 있어서 참 다행이다. 내 현실 표정보다 훨씬 과장되고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폭죽처럼 던져 날’릴 수 있다. 그렇다고 온라인 세상에서만 살 수도 없고 이쯤에서 나는 답을 찾아야 한다. 어제 사랑 표현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가 마침 ‘옛날엔 근엄한 아이였는데 나는 오늘부터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노력했더니 자꾸 더 표현하게 됐다고. 자꾸 하다 보니 또 자꾸 더 하게 됐다며 이젠 표현이 과한 사람이 되어 있다’는 친구의 증언을 듣고(본인이 산 증인이란다) 웃음이 났다. 그렇다면 나도 살짝 주문을 걸어볼까?
‘나는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지, 호들갑스럽게 표현하는 사람이지.’
생각만 해도 오글거리지만 사랑은 원래 말이 안 되기도 하고, 앞뒤가 없고, 엉망진창인 거니까 괜찮을 거야.
근데 말이지. 사랑이 넘치면 저절로 막 나오는 게 사랑 표현 아닌가? 나, 사랑 없는 상태인 거 아냐? 다시 되돌이표. 사랑은 정말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