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의 살림일지

아홉 번째 줄, 2942번 서랍

by 각진 동그라미

아홉 번째 줄, 2942번 서랍을 열다.


세탁기만 빼고, 나는 어린 나이에 웬만한 살림은 다 할 줄 알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는 내게 가스불을 켜는 법, 계란프라이를 굽는 법, 설거지와 밥솥에 밥을 하는 법, 청소기 돌리는 요령 등을 알려주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마냥 좋았다. 엄마가 하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으니까 마치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가스불은 켜고 나면 꼭 밸브를 잠가야 한다,

계란프라이는 기름을 적당히 두르고 껍질이 들어가면 빼내야 한다,

설거지는 뽀득뽀득 소리 나게 끝나면 싱크대를 정리하고 물기를 닦아야 한다,

쌀 컵 수에 따라 물을 안에 표시된 부분까지 맞춰서 넣고 쌀은 세 번 정도 박박 씻을 것,

청소기는 뒤에서 먼지바람이 나오니 환기를 꼭 시켜서 해야 한다.

또 뭐였더라 하여튼 뭔가 배운 게 많았다.


왜 알려주는지는 몰랐다. 그냥 재밌었다.

계란이 하얗게 익어가는 것도,

설거지할 때 접시에 뽀드득 소리가 나는 게 재밌었고,

쌀을 씻으며 쌀알이 흘러가지 않도록 조심조심해야 하는 게 하나의 미션 같고,

청소기 버튼을 누르면 코드가 휘리릭 감겨 들어가는 모습이 신기하고 재밌었다.


마냥 재밌기만 한 일을 왜 알려줬는지까지 알려줬다면, 내가 엄마를 조금 덜 원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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