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줄, 2949-2954번 서랍
아홉 번째 줄, 2949-2954번 서랍을 열다.
[가정폭력 주제를 포함한 내용으로 인해 심리적 불편함이 있을 수 있으니 신중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 전날 밤, 엄마는 외출을 하고서 어째서인지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제일 안쪽 방에서 컴퓨터를 하던 아버지는 종종 큰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지레 겁먹은 나는 일찍이 잠에 들었다.
월요일 아침, 평일에는 알람 없이도 7시에 알아서 눈을 떴는데 그때 엄마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그리고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사람이 박살 나는 소리인지, 가구가 박살 나는 소리인지 비명도 들리고 고함도 들리고 두려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원래 두려움을 느끼면 꽥 소리 한 번을 못 지르고 입을 앙 다무는 스타일이다. 입에 돌이 여럿 든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동생을 깨워 아침을 차렸다.
학교를 가야 했으니까 단지 그 이유로 아침을 차렸다. '저 방은 아무 소리도 안나는 방이다.' 속으로 번번이 되새기며 동생과 김에 밥을 먹는다. 동생도 두려운지 안방 문 앞을 기웃거렸다가, 밥을 먹었다가 앉았다가를 반복했다. 누군가 죽을 것 같은 비명이 들리고서야 동생이 벌떡 일어나 안방 창문과 연결된 베란다로 향했다가 뛰어들어왔다. "누나 엄마 죽으면 어떡해?"라는 말을 하고서 문을 빤히 바라봤다. 이윽고 방에서 아버지만 나와 학교 안 가냐며 소리쳤다.
등교 준비를 하는 중에도 동생은 연신 "엄마 괜찮을까?"라고 물었고, 그 물음조차 두려웠던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하굣길은 더욱 공포였다. '엄마가 죽었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나를 너무 괴롭게 했다. 엄마는 나한테 전부였다. 내 세상에 전부였다. 엄마가 없는 건 상상해 본 적 없고 상상할 수 없었다.
도착한 집에는 예전에 같은 빌라에 살던 윗집 이모가 와 있었다. 엄마는 내 방 침대에 누워있었고, 엄마 얼굴에는 커다란 멍이 들어있었다. 커다란 멍.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한참이나 지나서 겨우 한 말은 "엄마, 자?"였다. 엄마는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모는 엄마한테 잘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곤 집을 나갔다. 송장처럼 누운 엄마와 나 사이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땐 눈물도 안 나왔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한참의 적막 뒤에 엄마는.. "동생이랑 아이스크림 사 먹고 와"라는 평범한 말을 했다.
말할 수 있었구나 다행이다.
아무 일 없었던 거네 괜찮은 거네
비집고 나오는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집으로 막 들어서는 동생과 슈퍼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