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줄, 2949-2954번 서랍
아홉 번째 줄, 2949-2954번 서랍을 열다.
동생과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가는 길에는 서울에 계신 할아버지가 길 한복판에 우뚝 서 있었다. 갑작스럽게 보니 다른 사람 같았다. 집 안 어른이 오셨으니 모든 게 정리될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해졌다. 우리는 문방구에 파는 3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각자 하나씩 집어 들고 집으로 향했다.
돌아간 집은 상황이 심각해 보였다. 아침엔 죽는소리가 나던 방이 지금은 심각한 분위기가 되어, 언제 왔는지 모를 아버지까지 엄마와 할아버지 셋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비교적 안방과 가까운 내 방에서 동생과 둘이 마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무언가 들어보려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내 귀엔 많은 말들이 들렸다. '위자료 3,000만 원', '아버지가 빌려주세요.', '나 그런 돈 없다' 등등 위자료가 뭘까?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됐다. 드라마에서 늘 듣던 말이니, 이혼을 앞둔 막장 부부가 위자료 싸움하는 것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심장이 쿵 떨어져 멎은 것 같았다. 이제 우리 가족은 없는 걸까.
뒤늦게 우리 존재를 알기라도 한 듯, 문은 닫혔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 없는 방이 되었다. 저 방에선 티브이소리도 나고, 엄마랑 아버지가 서로에게 종종 장난을 치던 소리도 들렸고, 뛰지 말라고 소리치던 소리도, 이불 정리하라는 소리도 들렸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적막할 수 있는지. 작은 개미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그냥 화해한 거 아닐까, 할아버지가 뭐라도 아버지를 다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하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어느새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는 서울로 다시 올라가셨다. 어른이 없으니 다시 두려웠다가도 또다시 집을 나서는 아버지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목요일이 될 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시간 동안 엄마는 "아빠가 집에 오면 엄마는 잠깐 절에 다녀올 거야 절이 바빠서 도와달라고 하네"라며 "엄마가 없을 땐 누나인 네가 동생을 봐야 해"라는 뻔한 플래그 같은 말을 했다. 절은 엄마의 유일한 친척인 큰 집에서 운영하는 절이었고 나도 자주 갔으니 당연히 갔다가 돌아오는 줄 알았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목요일 저녁 여느 때처럼 셋이서 밥을 먹고, 엄마는 커다란 가방에 옷을 챙겼다. 이윽고 아버지가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엄마 몸만 한 요란한 하트가 그려진 짐 가방을 들고서 내게 말했다. "엄마가 없을 땐 뭐라고 했지? 네가 엄마야 동생 잘 챙겨야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엄마는 떠났다.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다 소파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제 엄마 집에 안 온다. 그렇게 알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