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방 3

아홉 번째 줄, 2949-2954번 서랍을 열다.

by 각진 동그라미

아홉 번째 줄, 2949-2954번 서랍을 열다.


아버지의 말은 나를 죽였다.

나를 아주 갈기갈기 찢여 죽여버렸다.


내가 멍하니 있는 동안 동생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티브이 소리만이 집을 떠돌았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 가만히 침대에 누웠다. 동생은 집전화기에 부재중이 떠 있다며 내게 들이밀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익숙한 엄마 전화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보같이 "엄마, 모르는 사람한테 전화 왔었는데 누군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뱉었다. 엄마 어디 있냐고 나도 데려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이 나오면 나도 소리 없는 방에서, 아버지가 죽여버리지 않을까.


엄마가 없는 다음날은 더 끔찍했다. 왜 내가 살림을 일찍 살게 됐는지 알게 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 청소기를 돌리고 부지런히 설거지를 했다. 어젯밤 엄마가 마지막으로 널어둔 빨래는, 마른 건지 안 마른 건지 알 수가 없어서 한참을 매만지고 있을 무렵 아버지가 누군가와 집에 들어섰다.


그를 따라 들어온 낯선 여자는 아버지 옆에 섰다. 모르는 여자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이 수건이 마른 건지, 안 마른 건지 모르겠어", "마른 것 같은데 왜 안 마른 것 같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니 아버지는 그런 건 안 해도 된다며 동생을 데리러 나가자고 했다. 동생을 데리러 가는 차 안, 동생의 태권도장은 바로 집 앞인데 왜 차를 타지? 의아한 마음으로 뒷좌석에 앉아있었다.


"이제 엄마라고 불러라"


아버지의 더럽고 치졸스러운 말이었다. 엄마가 있는데 왜 모르는 여자에게 엄마라고 부르라 하지. 조수석에 앉은 여자는 나를 돌아보며 "잘 부탁해"라는 더 이상한 말을 했다. 생판 모르는 남이 갑자기 내 엄마가 될 수 있나? 아버지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맞는 걸까? 이게 내가 여태껏 배워 온 효도와 예의에 어긋나는 걸까? 엄마라고 부르지 않으면 나도 죽일 것처럼 때릴까? 나는 아는 욕이 없어서 욕을 할 수도 없었다.


차에 탑승한 동생에게도 하는 말은 똑같았다. 동생은 곧잘 그 여자를 "엄마"라고 불렀다. 이런 걸 동생이라고 나한테 챙기라고 한 걸까 우리 엄마는? 아버지만큼이나 엄마도 미웠고 싫었다. 다 싫었다.


나를 영영 버린 엄마도,

생글생글 웃기만 하는 저 여자도,

더러운 아버지도.


당신이 만든 세상에서 가장 각진 모서리로 언젠가는 당신을 부수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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