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줄, 2955-3025번 서랍
아홉 번째 줄, 2955-3025번 서랍을 열다.
새엄마요?
내게는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운 '새엄마'라는 단어. 주변 천지를 돌아보아도 9살 어린이의 또래에겐 이혼가정도 드물었고, 더군다나 새엄마를 가진 집조차 없었다. 물론 집집마다 사정은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 당시의 내 주변에는 없었다. 지옥 같은 곳에서 지옥보다 더 낯선 사람이 생겼다. 계모처럼 나와 동생을 구박하거나, 손찌검 한 번 없었지만, 존재만으로도 최악이었다. 우리 엄마 자리를 갈아치운 사람. 그저, 상간녀에 불과했고, 아버지는 볼 것도 없이 그날 이후 나에겐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어른도, 부모도 아니었다.
분통이 터진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 밤마다 매일 울었다.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신분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새엄마는 시작일 뿐, 그 뒤로도 엄마 집에서 신혼 행세를 하던 이들은 이윽고 멀지 않은 곳에 신혼집을 차렸다.
그 신혼집에는 나와 동생, 그리고 '새언니' 마저 존재하게 되었다. 나와는 한 살 터울이던 그 여자의 딸이었다. 이제는 생판 모르는 이가 내 친언니가 됐다. 심지어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그 애도 밤마다 친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 그 마음만큼은 나와 너무 닮아있었다. 엄마인척 행동하는 그녀는 내게 '남편은 아파서 생을 달리했으며, 그러다 아버지를 만나게 됐다'라고 설명했으나 그녀의 딸은 말이 달랐다. 친아버지는 아프기는커녕 그저 하루아침에 새아버지가 생겼다 말했다.
가만히 살아 숨 쉬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다니. 대단한 여자다. 그녀의 대단한 행보는 내게 가히 함부로 굴어선 안 되는 인물이 되었다. 혹여나 나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두고 '둘째 딸은 생을 달리했어요.'라고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할 수 있었을 테니.
아버지는 세상 가정적인 사람인 양 굴었다. 이런 면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역시 두 집 살림 경력직은 남달랐다. 어딘가 다정하고 성실한 척을 했다. 본인은 좋은 아버지 가면을 쓰고, 내 얼굴에는 어떤 표정이 씌워진지도 모르는 채, 본인만의 행복한 가정에서 화목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결국엔 아주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내 안을 매 순간 찔렀다. 원망과 증오, 분노는 밖을 향하지 못하고 나를 야금야금 뜯어먹었다. 뜯어 먹힌 자국은 또다시 내게 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