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줄, 2955-3025번 서랍
작년 초등학교 1학년에는 체육대회를 했고, 2학년이 된 올해는 자연스레 ‘학예 발표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으레 학예 발표회란 대개 부모님 또는 조부모님이 방문해 학예 발표를 감상하며 담임 선생님과의 짧은 면담을 가진다던지 그런 시간을 보내는 날이었다.
마지막 실로폰 공연을 앞두고서 갑자기 나타나 나를 찾아낸 새엄마는, 본인의 딸. 그러니까 새언니의 반이 어딨 냐고 물었다. 내 설명에 답답했는지 공연 시간에 맞춰 나를 보내주겠다고 말하며 나를 이끌고 그녀의 반에 향했다.
반 앞에 겨우 도착해 새엄마와 떨어지고서는, 까칠한 담임 선생님을 떠올리며 아무도 없는 복도를 따라 뛰어 교실 뒷문을 열었다. 이미 공연은 시작한 뒤였고,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렸다. 선생님은 나를 한 번 바라본 뒤 끝끝내 공연을 마저 진행했다.
내가 앉아있어야 할 자리는 실로폰만 덩그러니 앉혀진 채 비워져 있었다. 어차피 내 학예 발표회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반 친구들과 다 같이 연습했던 공연들이니, 끝까지 멋지게 마무리하고팠던 나는 실로폰 공연이 끝날 때까지 화장실에서 눈물만 닦았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차가운 선생님의 눈초리와 나를 보며 소곤거리는 어른들. 세상에는 나만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누구에게 이 심정을 토로해야 할까. 어차피 아무와도 말할 수 없었기에 발 밑에 깔린 보도블록의 모양이나 색깔, 눌어붙은 검은 껌딱지 자국만 들여다보며 나를 앞서가는 ‘새 모녀’들의 뒤만 쫓아 집에 도착했다.
잠자리에 든 나는 ‘선생님께는 잘못했다고 해야겠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하루아침에 없던 새언니가 사실 내 친언닌데 엄마가 반을 헷갈려하셨다고, 그래서 안내하고 오느라 늦었다고 말하면 될까?’, ‘그냥 새엄마라고 할까’ 온갖 말들이 머릿속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등교가 두려웠다. 그럼에도 선생님이 “혹시 무슨 일 있니?”라는 말 한마디를 꺼내진 않을까 헛된 희망을 품기도 했다.
헛된 희망이라는 말이 맞았다. 다음 날, 쭈뼛하게 선생님 앞에 선 나는 어제 연습한 ‘잘못했다’는 말부터 꺼내려했지만, 단칼에 그녀는 “너는 어딜 갔다 왔었니?” 라며 쏘아붙혔고, 엄마가 언니 반을 헷갈려했다는 설명을 전하자 성가신 듯 자리로 돌려보냈다. 울지 않으려 꾹꾹 참아 등을 돌린 순간 내 뒤통수에는 차가운 말이 꽂혔다.
“지 엄마도 아니더만”
큰 죄를 들킨 것 같았다. 시끄러운 교실 소리는 저 멀리 떨어진 공간처럼 울려댔고, 쿵쾅거리는 내 심장소리만 들렸다. 마치 귀에서 심장이 뛰는 것처럼. 온몸이 뜨거웠다. 수치심에 어쩔 줄을 몰라하는 나는 눈물을 참아내지 못하고 또다시 화장실에서 수습해야만 했다. 울고 나면 항상 세수하고 오라던 엄마의 말이 생각나 세수를 연신 해댔다. 세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으므로.
한동안 아버지는 또 늦게 집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굴 보기가 힘들어질 지경이 됐을 때, 새엄마와 아버지는 함께 외출하러 나갔고 남겨진 나와 동생 그리고 새언니는 빈 집에서 각자의 놀이를 찾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더 이상 뜯을 손톱이 없어 입이 근질거리던 나는 주방을 이리저리 뒤적거렸고, 냉동실 구석 비닐봉지에 든 참깨를 발견했다. 왜 그걸 먹을 생각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그걸 냉큼 가져와 소파에서 티브이를 보는 내내 입에 한 움큼 집어넣고 씹어댔다.
입 안에 가득한 참깨는 마치 내 입에 늘 들어차 있던 모래처럼, 까슬까슬했다. 씹으면 고소했고 이상하게 그 맛이 좋았다. 항상 머릿속에 떠다니던 생각들이 사라지고 그저 입 안의 참깨에만 집중하게 됐다. 얼마나 퍼먹었는지 모를 때가 됐을 때, 구역감이 올라왔다.
고소한 맛이라고 느꼈던 건 이윽고 느끼함이 되었고, 그 느끼함은 변기 앞에 꿇어 모든 걸 토해내게 만들었다. 턱이 아리고 속이 쓰렸지만, 토해내고 나니 마치 그동안 속에 쌓였던 것들이 쏟아 나온 듯 개운했다. 너무나 후련했다.
집은 갈수록 냉랭해졌다. 예전에 엄마와 살던 집처럼 무어라 큰 소리가 오가진 않았지만, 참깨를 보관하던 냉동실처럼 차가웠다. 언젠가부터 새언니는 그 애의 외갓집으로 보내졌으며 아버지는 집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새엄마는 울고 있었는지 퉁퉁 부운 시뻘건 눈으로 혹시 하루 안방에서 같이 자지 않겠냐 물었고, 그 모습이 왠지 불쌍했던 나는 그녀 옆에 따라 누웠다. 가만히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작은 목소리로 전하는 사과였다.
“너희 아빠가 이제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네, 아마 내일부터는 친엄마랑 지내게 될 거야.”
내가 듣는 말이 말 같지 않았다.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엄마랑 지내게 된다고? 늘 바라왔던 일이지만, 기쁨 마음보다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갑자기 차에 받힌 것처럼 묵묵히 듣게만 됐다. 그래서 언니가 외갓집으로 들어갔구나, 어쩐지 아버지가 집에 안 들어오더라는 둥, 그런 생각들이 머리 안을 떠다녔다.
“혹시 아빠한테 말해줄 순 없어? 지금처럼 지내면 안 되겠느냐고 한 번만 말해줄 순 없어?”
그녀의 울음 섞인 말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참깨를 가득 먹은 날처럼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돌아본 그녀의 얼굴은 잔뜩 찡그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웃음이 나왔다.
시퍼렇게 큰 멍이 얼굴에 자리 잡은 우리 엄마가 내 방 침대에 송장 마냥 누워 내게 그저 아이스크림 사 먹고 오라고 했던 날, 아무 일이 없었다는 안도감이 밀려오며 나왔던 웃음처럼 입꼬리를 씰룩거리게 만들었다. 갑작스럽게 엄마를 만난 날에도 나오지 않았던 웃음이, 그날 밤에는 마치 티브이 프로그램이었던 ‘개그 콘서트’를 본 사람 같이 앞 뒤 가리지 않고 튀어나왔다.
명치 속에서 시퍼런 칼날 하나가 쑥 하고 빠져나왔다. 그것은 지난 설움과 분노와 증오가 담겨있었으며, 내가 흘린 눈물들이 몇 날 며칠을 갈아둔 서슬 퍼런 칼날이었다. 칼자루를 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있는 힘껏 그녀를 찔렀다.
“아줌마가, 다신 내 눈앞에 안 나타났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