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부터 열세 번째 줄, 3026-4520번 서랍
“너는 엄마한테 연락 한 번을 안 하더라?”
다시 만난 엄마에게 들은 첫 번째 말이었다. 우리와 떨어져 지낸 동안 엄마는 운전면허를 따고서는, 작은 경차를 몰고 다녔다. 그 경차 운전석에는 엄마가, 조수석에는 아는 이모가 그리고 뒷 좌석에는 나와 동생이 타고 있었다. 본인에게 연락 한 번이 없었네, 새엄마랑 그렇게 잘 지냈냐는 갈퀴 같은 말들을 계속 해서 쏟아내고 있는 엄마는 분명 우리 엄마가 맞았다.
아무 말이 없는 나를 대신해 “그래 엄마한테 연락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엄마 너무 속상했겠다, 얘.” 라며 맞장구를 받아치는 이모와, 눈치도 없이 새엄마가 어땠고 어쩌고 쉴 틈 없이 조잘거리는 동생 사이에서 그저 엄마의 좌석 시트만 바라봤다. 다시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왔어도 엄마나, 아는 이모들이나 하는 말은 같았다. 엄마가 매우 힘들어했으며, 어쨌든 앞으로는 엄마 말을 잘 듣고 잘 지내야 한다고.
나도 할 말은 많았다. ‘아버지가 엄마를 그렇게 팼는데, 어떻게 반항을 해?’, ‘내 학예회 날에 어땠는지 알아?’, ‘나도 엄마처럼 집 나갈 수 있었어 알아? 근데 나보고 뭐랬어 동생 잘 보라고 했잖아’, ‘엄마도 날 찾긴 했어?’라는 가시 박힌 말들이 수 없이 목구멍에 걸려있었지만 성게 같은 말들은 고통스러워도 모조리 삼켜야 했다. 그게 겨우 찾은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일일 테니까.
이 집의 피해자는 엄마였다.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그런 아버지를 따라나선 나와 내 동생은 파렴치한 딸과 아들이었을 뿐, 그 누구 하나 나를 위로하거나 그간 마음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가 없었다. 원래도 사과가 없는 집이었으니 사과는 바라지도 않았다. ‘이게 나한테 사과할 일인가?’, ‘사과는 엄마가 받아야 하나?’라는 생각들이 들 때 즈음 나는 마음을 걸어 잠그기 시작한 것 같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일이 있고서도 우리 집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냈다. 내가 그토록 지독한 악몽이길 바랐던 소망처럼 모두가 악착같이 외면하고 피했다. 유일하게 달랐던 점은 아버지가 엄마에게 한동안 잘해줬다는 것이었다.
아홉 살에서 열세 살까지 자라는 동안 가끔씩 엄마가 떠나던 날의 기억이나, 울부짖는 동생의 울음소리, 화장실에서 눈물이 멈출 때까지 세수를 하던 기억 같은 것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꿈을 꿨다. 새벽에 깰 때에는 안방에 잠들어있는 엄마를 확인하곤 했다.
습관처럼 엄마의 퇴근을 기다리거나, 아버지와 엄마가 부부싸움을 한 다음날에는 엄마가 짐을 싸고 있진 않은지 살폈다. 하굣길에는 엄마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하며, 마치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처럼 변해갔다. 아버지가 가끔 살림살이를 박살 내곤 했어도 엄마가 집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졌다. 그 모든 행동들과 마음은 결국, 엄마를 향한 애증으로 이어졌다.
나는 ‘맏이’라는 이유로 엄마가 없으면 엄마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소름 끼치게 싫었다. 나도 보호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이였다. 엄마를 나만 소유하고 싶었으며, 내 옆에 항상 있었으면 했고, 단 한 번도 그저 잘했다는 말없이 항상 ‘조금 아쉽다’, ‘하나만 더 맞추면 백점인데’ 하는 어딘가 부족한 칭찬도 늘 듣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커질수록 다른 마음 한 편에서는 왜 나만 엄마를 붙잡고 사는 기분인지, 왜 엄마가 없으면 그 책임을 내가 다 해야 하는지, 내 부족한 점은 왜 그렇게 잡아대는지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가득했다.
하루는 새벽에 배가 너무 아파서 잠든 엄마를 깨웠다. 엄마는 자기가 도대체 뭘 해줄 수 있냐며 짜증을 내곤 다시 잠들어버렸는데, 엄마 옆에 쪼그리고 누워 내 배를 한참 움켜쥐고 있다가 방으로 기어 들어간 적이 있었다. 내 아픔이 엄마의 잠보다 우선순위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은 발 등에서 긴 창이 삐져나와 마치 내 아래턱부터 정수리까지 관통하는 기분이었다. 관통된 턱은 움직일 수 없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후에 열이 펄펄 끓는 감기에 걸렸지만, 아무렇지 않게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었다. 병원에서는 열이 상당한데 어떻게 수업을 들었냐며 참을성이 대단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련한 일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말조차 칭찬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었다.
하지만 ‘아프다’는 말은 엄마에게는 곧바로 거절당할 말이었다. 그래서 내겐, 그 말은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엄마에게 거절당한다는 건, 나를 다시 ‘버림받은 기분’으로 만들기 적당했다. 어린 내게 엄마는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내 모든 것이자, 내 세상이었으므로 내 세상에게 버려진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일이었다.
‘아프다’라는 말 외에도 어려운 말들은 하나씩 늘어가기 시작했고, 그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에는 늘 관통된 창이 꽂힌 사람 마냥 나오기 힘들었다. 이러한 찰나가 모여 ‘선택적 함구증’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나는, 이기지 못한 말들을 마음 안에 몇 개쯤 지니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