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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진 Dec 20. 2021

15년 전 아빠의 눈물

아빠 이제 편히 쉬세요

폐결핵으로 한 달 동안 병원에 계셨던 아빠가 2021년 12월 8 일 낮 12시 20분에 떠나셨다.


아빠는 비싼 옷과는 거리가 먼 분이시지만 훤칠하신 키와 좋은 자세만으로도 스타일이 멋져 보이시는 분이셨다. 깔끔한 외모에 맞게 주위가 항상 청결하고 단정 하였으며 남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시는 걸 싫어하셨다. 어려서는 잘 몰랐지만, 나도 자라서 몇 명의 남자들과 연애도 해보고 또 결혼 생활도 해 보니, 아빠한테는 당연한 그런 깔끔함이 문뜩문뜩 그리워질 때가 꽤나 많았다.   


고생을 하며 긴 세월을 사신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아버님들이 그러하시듯 아빠는 다정다감한 말솜씨가 없으셨지만, 마음이 따뜻한 분이셨다.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우리 집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는데, 처지가 딱한 외 사촌 언니가 우리 집에서 한 동안 같이 살았다. 자기 사촌도 아닌 엄마의 사촌을 아빠는 흔쾌히 돌봐주신 거였다.


아빠는 책임감 하나로 세상을 사셨다.

어려서부터 아빠는 어린 나와하신 작은 약속도 틀림없이 지켜주시는 분이셨다. 

어느 가정이나 한두 번의 힘든 시기는 경험하듯이  예전에 우리 집도 몇 차례의 위기가 있었다. 그때마다 아빠는 그 좋아하시는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시고 어려움에 대처하시며 우리 2남 1녀를 지켜 나가셨다.

하나밖에 없는 막내딸을 자기가 원하는 곳에 시집보내야 한다는 것도 아빠의 무거운 책임감의 일부였었나 보다. 15년 전, 내가 일본에 시집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보수적인 성격의 아빠가 틀림없이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빠는 결혼을 허락하시고, 방에서 슬그머니 나가시더니 세수를 하시는 척하시며 울고 계셨었다. 코로나 팬데믹 전에는 일 년에 몇 번씩 한국에 왔다 갔다 하면서 부모님을 뵙었고, 부모님과 떨어져 일본에 사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그다지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코로나 유행으로 2년 동안 발이 묶여 한국에 갈 수가 없었다. 하필 그 사이에 아빠는 몸이 많이 안 좋아지신 거였다.


박 노해 씨의 「건너뛴 삶」이라는 시에 인생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건너뛴 본질적인 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15년 전의 아빠의 눈물을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의 아빠의 눈물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나에게는 본질적인 물음이어야 했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은 점점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사셔야 하는데, 자식으로서 그런 부모님을 곁에서 돌보아 드릴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지... 그 대가로 나는 이렇게 다시 아빠의 15년 전 눈물과 고스란히 만나야 했다.

임종하시던 날  간호사분의 도움 으로 다행히 아빠와 짧게 화상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너무 힘들어 보이시는 아빠의 얼굴을 뵈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입관식 때까지도 눈을 제대로 감지 못 하셨다.


아빠… 힘들고 외로우실 때 곁에 있어드리지 못해서 많이 죄송해요. 이제 모든 짐은 다 내려놓으시고 편하고 자유롭게 지내시기를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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