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내가 만난 최악의 남자.
복수전공을 하면서 3, 4학년 동안 학점을 꽉꽉 채워 듣게 됐다.
이번 학기도 21학점이다.
그 덕에 과제와 온라인 강의, 시험으로 점철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거기다 브런치와 블로그, 유튜브 채널 영상 준비까지 병행하면서, 숨 돌릴 틈 없이 1분 1초를 허투루 쓰지 않고 살고 있다.
주말과 평일, 공강과 공강의 아닌 날이 구분이 없어진 것은 학기 시작과 동시에 계속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다 보니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진 않은지 자꾸 되돌아보고, 주변을 둘러보게 됐는데, 물론 놓치고 지나가는 것들도 많았지만,
평소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찬찬히 생각해 보니 얻게 된 값진 것들이 제각각 반짝거렸다.
그중에서 나한테 꽤나 충격적이고 상처가 됐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에 너무 어이없고 웃기기도 했던 기억인데 돌아보면, 볼수록 그 친구 참, 무례하고 선을 모르는 친구였구나 싶다.
스무 살, 갓 대학에 입학했던 아무것도 모르던 신입생 새내기 시절의 이야기이다.
나는 친구관계가 매우 좁은 편이었고, 여중 여고를 나왔고, 주변에 남자가 없었다.
친구와 관계 형성을 하고 유지를 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부모님과 오빠, 우리 가족 사이에서 나라는 사람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만 해도 멘털이 강한 듯 연약한 나로서는 버거웠다.
거기다 학업에 열중해야 하는 시기란 생각에 공부에 미쳐 있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것도 실상은 통학할 수 없는 거리에 있는 학교에 갈 거라면 일찍이 직업을 가지라는 부모님께 반항적인 마음, 뭔갈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반발심과 오기, 독기를 품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었다.
대학에 올 때, 진작에 CC커플이 얼마나 안 좋은 것인지 웹드라마와 주변 조언을 통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교 내에서 누군가와 연인이 된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도 없었다. 내겐 그저 다 같은 동기, 친해지면 편하고 좋을 친구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대학교에서 만나는, 사회에서 만나는 친구는 학창 시절에 만났던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생긴 선입견일 수도 있고, 남녀 관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이런 행동을 하면, 이성 관계에서는 "얘가 나한테 이성적으로 호감이 있나?"라고 생각할 거라는 범주를 잘 몰랐다.
잘 웃는 것, 리액션이 큰 것, 카톡 답장을 해주는 것,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아서 같은 수업을 듣게 되면 지하철을 같이 타게 되는 것 등등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오해가 생긴다는 걸 잘 몰랐다. 그냥 나한테는 다 친구니까 평소에 여자인 친구들을 사귈 때처럼, 그리고 평소의 내 모습대로 행동했다.
그게 문제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그 친구가 내 인생에 스쳐 지나가면서 많은 것들을 깨닫도록 도와준 것일 지도.
그 친구와 나는 같은 과 동기였고, 그 친구는 재수를 해서 97년생이었다.
너무 많은 안 좋은 기억이 있는데, 오늘은 그중에서 한 가지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 친구와 전공선택과목과 교양필수과목이 시간표가 겹쳤고, 어쩌다 보니 두 과목 다 팀플이 같은 조가 됐다.
전선은 그 친구가 조장이었고, 교필은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얼결에 조장을 떠맡게 됐다.
2과목을 팀플을 같이 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카톡을 주고받을 일도 자연스레 생겼다.
물론 이성적인 감정은 전혀 안 생겼다. 일단 치인트의 상철 선배랑 똑 닮은 외모도 외모지만, 그 말투와 태도가 너무 비호감이었다.
비아냥거리는 듯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듯한 태도가 너무 싫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대놓고 피하거나 싫다고 말할 성격이나 상황이 못 됐다.
그저 혼자서 삭히고 주변 친구들에게 하소연했다.
돌아보면, 참 나도 그리 좋은 친구는 아니었다 싶다.
집에서 학교까지 통학하는 데 왕복 4시간, 3일 연속 1교시가 있고, 우주 공강이 있고, 21학점을 듣던 나는 그 두 과목 외에도 팀플이 많았고, 모든 게 서툴고 오고 싶던 학교도 아니었던 학교에 와서 체력적, 심적으로 지쳐 갔다.
근데 그 친구가 전선은 열심히 하면서, 교필은 다른 친구가 위키백과를 베껴서 보내 준 자료를 다시 베껴서 보내주면서 나한테 ppt를 만들라는 것이다. 발표는 자기가 맡겠다며. (결국 발표도 내가 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 교필 발표 준비를 혼자 떠맡아서 준비하면서, 다른 과목 팀플과 과제, 시험에 허우적거리며 매일 울고 밥을 거의 못 먹고 1일 1식을 하면서 잠을 잘 시간이 없어서 생명수처럼 커피를 1L씩 사 먹었었다. (그 때문인지 그 이후로 카페인 과민 반응이 생겨서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는 전혀 먹지 못하고 있다.)
중3 이후로 줄곧 60kg 대를 유지하던 나는, 이때 57kg까지 살이 빠지게 된다. 이때 62-3kg가 평균적인 수치였는데 매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잘 못 먹고 심적으로 시달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1-2달 만에 5-6kg가 훅 빠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친구들이랑 하고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우연히 들었는지,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게 빠진 거야? 어디가 빠진 거지?
'아직도 빼야 할 살이 너무 많고, 이전엔 정말 살이 너무 쪄있었는데 지금 몸이 살이 빠진 거라고?'라는 함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만큼 친한 사이가 전혀 아니었고, 아무리 친해도 그런 말을 해선 안 된다.
그런 관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나는 지금만큼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게 마음이 힘들어서 빠진 몸이었어도, 그 몸매를 좋아했다. 바지를 좀 더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게 좋았고, 더 이상 60kg대의 여자라는 시선과 창피함을 갖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그리고 두려웠다. 살이 빠진 지금의 모습도 뚱뚱하다고 보는데, 살이 다시 찌게 되면 나를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볼까 가 걱정됐다.
결국 나는 다시 3끼를 먹으면서 최고 몸무게인 67kg까지 찍기도 했다. 그리고 54.3kg까지 빼보고, 다시 63kg까지 살이 쪘다가 52kg까지 빼고 유지하면서 강박증과 무월경도 경험했다.
현재는 57kg 대로 최저 몸무게인 52kg보다 5-6kg가 늘어 있다.
그래서 때론 너무 뚱뚱하단 생각도 하고, 빨리 빼고 싶단 생각도, 살이 너무 붙어서 절망하기도 한다.
근데 그때마다 다시 떠올린다. 그게 빠진 거냐며 비웃던 그 친구와
그 말에 작아졌던 내 모습과,
1일 1식을 하면서 힘겹게 살다 보니 가져 봤던 그 당시 최저 몸무게가 지금의 몸무게임을.
3끼를 다 양껏 먹고도 그때의 몸무게와 같다는 것을, 그때는 주눅 들고 나를 사랑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고, 이런 얘기를 담담하게 꺼내 놓을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그때의 내가 있어서 지금의 나도 있고, 그때 없었기에 지금 갖게 돼서 값진 것들이 있다.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잃거나 포기하거나 놓치게 되는 것들이 있고, 그 덕분에 얻게 되는 귀한 것들이 있다.
그 두 가지 모두 인식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놓친 것들을 아쉬워하며, 우울해하지도, 얻은 것을 보며 우쭐해하지도 않으면서, 이것을 얻은 덕분에 이것은 포기하게 됐구나, 그래서 이런 과정을 겪었구나 하는 인지 속에 나아가기를 바란다.
세상을 살다 보면, 참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때론 정말 악연이라고 생각되는 나쁜 인연도 마주치게 되는데, 이제는 그런 인연에 너무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 여유도 생겼다.
결국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느냐 보다도 그 상황을 대면하는 내 태도와 관점이 그 당시의 감정과 기억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이젠 잘 안다.
그래서 이젠 힘든 일이 있거나, 스트레스받는 상황이 생기면 이렇게 생각한다.
나 이번엔 뭘 배우라고 이렇게 힘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