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takyushu, Japan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꼭 한 번은 바에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칵테일을 좋아하는 건 둘째고 바라는 공간 특성상 새로운 인연과 대화를 나누며 추억이 생성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고쿠라 헤이와도리역 인근 이곳 바 리치 타임은 고쿠라 최초의 바로 알려져 있다. 밤이 되면 호객하는 사람이 막 붙는 유흥가 기운이 짙은 동네 속에 자리해 괜히 발걸음이 주춤했다.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여든이 넘어 보이는 정정하신 노신사 바텐더와 그 곁의 사모님께서 맞아주셨고 두 분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두 분은 나란히 체크 셔츠에 조끼를 차려입고 계셨다.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세련됨에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멋이란 게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최초의 바라고 해서 조금은 촌스러운 공간을 떠올렸지만 캐시박스, 주크박스, 시계, 포스터까지 모든 요소는 리얼 빈티지 감성이었다. ‘월드 베스트 바‘들과 견줘도 절대로 뒤지지 않는
오히려 따라 하려 해도 흉내 내려 해도 결코 재현될 수 없는 시간의 인테리어였다. 위스키는 메뉴판이 따로 없어 칵테일 리스트를 대신 받았고 첫 잔은 시그니처인 ‘진 리키’를 주문했다.
19세기 말 워싱턴 D.C.에서 탄생한 유서 깊은 클래식 칵테일로 이날 처음 마셔봤는데 진 토닉과 비슷하겠지 했던 예상은 꽤 정확했다. 대신 그보다 단맛이 덜하다는 차이는 있었다.
첫 모금은 진 특유의 소독약 같은 은은한 향에 탄산수처럼 투명하게 지나갔다. 그러다 뒷모금에서 드라이함이 탁 치고 올라왔으며 약간의 시트러스가 날카로운 끝을 살짝 감싸주었다.
바텐더께선 말씀이 적으셨고 사모님은 내내 다정히 말을 건네주셨다. 내가 주크박스에 호기심을 보이자 사비로 캐시박스에서 동전을 꺼내 넣으시더니 직접 주크박스를 가동해 주셨다.
잠시 후 철커덕 CD 소리 뒤에 울려 퍼진 비틀스의 ‘Let It Be’. 주크박스 이야기를 나누며 언급된 ‘Let It Be’ 기억해 주신 듯 울렁이는 음질의 색다른 ‘Let It Be’가 공간을 감쌌다.
노래 한 곡이 흐르는 동안 주크박스뿐 아니라 이 공간의 모든 건 내 세월을 한낱 종잇장처럼 가볍게 만들어버렸다. 떠나고 싶지 않아 리키를 마친 뒤엔 자연스레 위스키로 넘어갔다.
진열대 한편 빈병이 거의 다 된 야마자키 12년이 눈에 들어와 요청드렸다. 바텐더께선 떨리는 손으로 남은 분량을 모두 따라주시곤 신중히 새 병까지 개봉해 니트로 꽉 채워주셨다.
그의 섬세한 손길과 조심스러움이 긴 세월과 무게를 그대로 담고 있는듯했다. 첫 모금은 머금고 입안에서 살짝 굴리기만 했고 세련된 스파이시함과 달콤한 꿀 향이 은은히 뒤따랐다.
목을 타고 넘긴 후엔 은은한 오크의 여운이 길게 남으며 싱글몰트 특유의 깊고 섬세한 결을 보여줬다. 이날 밤, 영광스러운 유일한 손님이었는데 야마자키를 끝으로 두 시간이 흘렀다.
그것도 끊이지 않는 스몰 토킹 속에서 흐른 두 시간. 20년 후에 이 바는 과연 누구의 손에 운영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며 포근한 기억을 품고 두 분께 작별 인사와 존경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