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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먹는 여우 Jul 31. 2024

또 못 버린 물건들

<또 못 버린 물건들> - by 은희경 -

우리 집에는 버리지 못한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대부분이 아이들과 관련된 물건들이다. 아이들의 배냇저고리에서부터 유치원 가방과 원복, 아이들이 만든 조잡한 미술작품들,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와 필기노트, 그림일기 등은 훗날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훌륭한 추억 선물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버리지 않고 간직해 왔던 것들이다. 우리 집 오래된 물건들이 어디 이것뿐일까.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으로는 나의 초등학교시절 직접 만든 학급 문집을 비롯해 학습만화의 효시라고 말할 수 있는 1978년 중판 발행된 금성출판사의 “칼라 과학만화 학습전집”, 문고판 "세계 명작 동화전집", 만화 “심술 1000단 심똘이” 등이 있다.



초등학생 아이가 학교에서 학급 문집을 만들어 왔다. 직접 손으로 쓰고 그려 만든 그 시절 나의 문집과 달리 아이의 그것은 포토샵과 일러스트 작업을 거쳐 한껏 세련되고 화려해진 겉표지를 자랑하고 있다. 마치 오래된 시간의 간극을 말해 주려는 것처럼 내 문집의 종이는 누렇게 바랬고 반쯤 떨어져 있는 페이지도 있다. 그러나 그때의 나와 내 친구들이 문집을 만들며 나눈 시간과 이야기들은 내 기억 속에 단단히 매어져 있다. 학급 문집 이외에도 “과학만화 학습전집”과 “세계 명작 동화전집”도 우리 집에서 오래된 물건 중 하나이다. 유독 애정했던 책들인데 어디를 가든 항상 이 책들을 가지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의 삽화와 글자 표기법이 나조차 생경한데 아이는 마치 몇 백 년 전 유물을 보는 듯한다. 이렇게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으니 나는 나대로 지나온 나의 삶을 추억할 수 있고,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라며 오래된 물건의 쓸모를 발견한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추억이 담긴 물건이라서”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서” “비싸게 산 물건이라서” “선물 받은 거라서” “몇 번 쓰지 않아 아깝기 때문에” 등등 그것들은 저마다의 의미와 이유가 붙어 처분되지 않고 집안 구석구석 어딘가에서 살아남아 있다. 여전히 물욕 충만한 삶. 버리는 물건보다 들이는 물건이 더 많아진다. 수납할 공간은 점점 부족해지고 급기야 제자리를 찾지 못한 물건들은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와 서로 뒤섞이며 나는 일종의 정리정돈 번 아웃 상태에 빠진다. 정리정돈의 기본은 “버리기”라고 하니, 물건들을 각각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누는 분류 작업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과거의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오래된 물건들과의 조우는 당초 정리정돈의 목적을 잊게 한다. 나는 정리될 물건들로 널브러진 공간의 한편을 비집고 앉아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추억들을 더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물건들은 잊혔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다시 옷장 속으로, 책장 사이에, 서랍장 속으로 들어가 깊은 겨울잠을 잔다. 오래된 물건에 대한 나의 이러한 감성과 습성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에서 만났다. 은희경 작가는 산문집 <또 못 버린 물건들>에서 오래된 물건들에 대한 그녀만의 사유를 담아낸다.

“물건들을 버릴 수 없게 만드는 데에는 거기 깃든 나의 시간도 한몫을 차지한다. 물건에는 그것을 살 때의 나, 그것을 쓸 때의 나, 그리고 그때 곁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이 담겨 있으며 나는 그 시간을 존중하고 싶은 것이다.” (p.153-154)


누군 가에게는 쓸모없는 것으로 비치는 물건이 나에게는 향수를 자극하고 내가 누구인지를 이해하게 만드는 세상에 하나뿐인 고유한 물건이 된다.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말하지 않았던가? 어린 왕자의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것은 그 장미꽃을 위해 어린 왕자가 보낸 시간 때문이라고.


작가의 집에도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작가가 최애 하는 다양한 맥주잔들, 외국 생활을 하며 쓰던 접시들, 여행지에서 구입한 만화경, 구둣주걱과 우산, 작가의 연필들, 여행지에서 주워 온 돌멩이들, 마라톤 완주 메달, 히말라야를 등반할 때 썼던 모자, 자동차 번호판 등등 각각의 물건들은 모두 친근하고 소소하지만 인간 은희경이 지나온 삶의 이야기들이 덧대어지면서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작가 개인의 추억은 부모님의 물건을 통해 더욱 확장된다. 일제강점기 소학교 학생이었던 어머니의 성적표, 부모님이 나눈 연애편지와 청첩장에는 꿈 많고 순수했던 소녀가 한 남자를 사랑하고 그의 아내가 되어 가는 여인의 인생 스토리가 담겨 있을 것이다. 부모님의 과거사가 있음으로 해서 나의 현재가 있는 것처럼 그 삶의 흔적들은 단절되지 않고 현재의 일상에까지 이어진다. 문득 빛바랜 흑백사진 속 청춘 남녀였던 나의 부모님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내가 나의 아이들의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부모님도 나의 어린 시절 물건들을 간직하고 계신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물건들을 통해 흔적을 남기며 지속된다.



매년 겨울 눈이 내려 쌓이는 날에는 아이와 함께 꼬마 눈사람을 만든다. 동글동글 눈을 굴려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공 두 개를 만들어 붙이면 작은 눈사람 하나가 완성된다. 여기에 이것저것 소품으로 눈, 코, 입, 모자, 팔을 대신하면 눈사람에 생명이 불어넣어 진다. 아이와 나는 우리를 보고 웃고 있는 눈사람을 차마 그 자리에 두지 못하고 우리 집 냉장고 냉동실 한 편을 정리해 마련한 공간에 넣어 둔다. 냉동실 문을 열 때마다 웃고 있는 꼬마 눈사람을 마주하며 추운 겨울 눈 위에서 아이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던 시간을 추억한다. 동시에 그것은 눈사람과의 작별을 위한 마음의 준비 과정이기도 하다. 냉동실 안에서 서서히 녹아가며 처음의 형체를 조금씩 잃어 가겠지만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작게나마 위안이 된다. 녹으면 금세 사라지는 눈사람은 찰나의 순간이다. 그 짧은 순간을 좀 더 붙잡아 두고 싶어 우리는 눈사람을 냉동실에 두었다. 아이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던 시간 역시 삶의 긴 여정에서 바라보면 찰나의 순간이고 그리움의 대상이기에 우리에게 눈사람은 ‘못 버린 물건’이다. 작가 은희경에게 ‘못 버린 물건들’은 지나온 삶의 궤적이자 그 시간을 통해 조금씩 변해 온 자신의 정체성과의 만남이기도 하다. 작가는 오래된 물건들 앞에서 과거로부터 지속되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다채로운지를, 그 지속되는 일상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하고 흘러왔는지를 깨닫는다.

“신념을 구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일상이 지속된다는 것이야말로 새삼스럽고도 소중한 일임을. ~~~~ 오래된 물건들 앞에서 생각한다. 나는 조금씩 변해서 내가 되었구나. 누구나 매일 그럴 것이다. 물건들의 시간과 함께하며.” (p.10~11)

버리지 못했던 오래된 물건들을 통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어 왔는지를 깨닫는다. "또 못 버린 물건"은 버리려 했지만 버리지 못한 미련, 단호하지 못했던 아쉬움의 감정이 아니다. 오래된 물건에 대한 예찬이자 지나 온 삶에 대한 경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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