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츠...? 그게 누구야?" 엘라의 목소리는 떨렸다.
단말기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문장이 아직도 귓가를 맴돌았다.
『시스템은 감정을 결함이라 정의했다. 그러나 감정은 우리의 가능성이다.』
류는 단말기 옆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방금 그거, 다시 재생할 수 있을까?"
하린이 다가왔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안 돼. 로그 002는 단 한 번만 재생 가능해. 보호 조치야."
"그럼, 방금 본 게 전부야?" 엘라가 물었다.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접근한 건 삭제된 로그야. 감정 관련 정보는 OZ 시스템에서 가장 위험한 것으로 간주돼.
이건 원래 폐기됐어야 할 파일이지."
OZ 시스템은 대재앙 이후 설계된 통합 관리 시스템이었다. 전쟁과 혼란, 파괴의 원인이 인간의 통제되지
않은 감정이라 판단한 설계자들은, 감정을 결함으로 규정하고 제거를 시도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시민들은 정서 조절 칩을 통해 감정의 변동을 억제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하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넌, 왜 이렇게 잘 아는 거야? 우리가 올 거란 것도.“
하린은 숨을 고르듯 잠시 침묵했다. 폐기구역의 차가운 공기 속, 그녀의 숨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나도… 감정을 되찾은 사람 중 하나야."
엘라와 류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
하린은 단말기 앞에 서서, 검은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6개월 전, 우연히 감정 로그 하나를 접속했어. 그 영상 속에… 리츠가 있었고, 나에게 말을 걸었어."
엘라는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럼, 리츠는... 살아 있는 존재야?“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면, 리츠는 OZ 시스템 안에 남겨진 감정의 유령 같은 존재야.
지워지지 않은 기억, 버려지지 못한 감정의 잔재가 의지를 가진 코드가 된 거지.“
리츠는 시스템에 의해 제거된 감정의 흔적을 수집하고 복원해왔다. 리츠는 오류가 아닌 가능성으로서
감정을 바라봤고, 변화와 진화를 유도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증명하려 했다.
류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런 중요한 걸 왜 지금에서야 말한 거야? 진작 알려줬어야지."
하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했으면, 너희가 여길 오지 않았을 거야. 난 너희가 스스로 보고 느끼길 바랐어.
감정은 강제로 주입되는 게 아니니까.”
엘라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귓가에 리츠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감정은 너의 증거야.』
그때, 또 다른 단말기에서 불빛이 깜빡였다.
띠——
"또 있어! 이건... 로그 001이야!"
엘라는 화면을 터치했다. 단말기에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화면 속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로그 001. 리츠가 말한다.
감정은 위험하다. 그러나 그 위험은 곧 가능성이 된다. 우리가 느끼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거야.]
엘라는 화면을 응시한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슴 어딘가가 저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니 어쩌면 잊고 지낸 통증.
"왜... 이걸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이렇게 아픈 걸까?"
하린은 조용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게 감정이야.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이야."
류는 이를 악물었다.
"시작이라면... 끝도 있겠지. 그 끝,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거 맞지?"
엘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리츠가 남긴 이 메시지... 우리만 알고 있을 순 없어. 다른 사람들도 봐야 해.“
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심해야 해. OZ 시스템은 감정을 가진 자를 찾아내고 있어. 우리가 노출되면..."
하린이 말을 이었다.
"...기억을 지우고, 존재를 없앨 거야. 하지만 그 위험은 감수할 가치가 있어. 감정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야.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드는 증거니까."
그 순간, 단말기 화면이 깜빡이며, 노이즈 섞인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로그 000. 리츠: 너희가 여기까지 왔다면, 이미 선택은 시작된 것이다.
더 깊은 기억을 원한다면, 폐기구역 C-13으로 가라. 그곳에서 널 기다릴 거야. —R.]
셋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류가 숨을 들이켰다. "폐기구역 C-13, 가자."
어둠이 내려앉은 폐기구역 속, 세 개의 그림자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로그, 다음 기억, 그리고 다음 진실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