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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영 Oct 31. 2024

듣는 귀 만들기

말이 없어도 말이 되는 놀라운 화법

말 잘하기, 정확하게 표현하기 등 주로 전달자 입장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면, 반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예를 들어가며 현재 상황을 그 무엇보다 풍부하고 정확하게 표현했더라도, 상대방이 대화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말꼬리만 잡는다면 아무 소용없다.

 

후회스러운 상황들이 빠르게, 되돌려 감기로 중간중간 멈추었다가, 플레이되었다가, 한다.

훤칠한 키에 경찰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갔다. 인사팀장이 내게 속삭였다.

'저분이 담당 경사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경사 앞에 섰다. 아무 잘 못도 없는데, 이상하게 위축되었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의 소속과 직함을 밝히고 회사 책임자로서 현재 상황들이 오해 없이 정리될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하겠다며 이야기를 전했다.


무엇 때문인지 화가 난 고객은 다짜고짜 사무실로 찾아와 난동을 부렸고, 경비와 경찰을 부르는 와중에 직원과 고성이 오가며, 약간의 몸이 부딪히는 실랑이가 있었다고 했다. 그 직원은 예상했겠지만,


"세라님, 괜찮아요? 많이 놀라셨겠어요."


서러운 듯, 화가 나는 듯, 매우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너 때문이야,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의 미간을 매섭게 째려보다가 이내 내가 직장 상사라는 것을 순간 뇌가 인지한 것인지, 갑자기 표정이 온화해졌다.


"아,실장님. 오셨어요. 괜찮습니다. 늘 있는 일인데, 오늘 좀 과하긴 했네요."


아니, 온화해진건 단순 착각이었다. 매우 불편한 기색으로 말을 이어갔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대체 채용은 왜 안 하는 것인지, 본인에게 주어진 업무가 이 것이 맞는 건지, 결론적으로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등, 나름의 의견을 정리해서 당돌하고 거침없이 내게 쏟아내었다. 부족한 일손에 대한 비판적 관점 때문에 모든 상황의 핑계가 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반론하지 않았고, 잘 들어주었다. 이것이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공감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듣는 귀'이다. 이를 통해 일정의 갈등을 해결할 수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듣는다'는 행위가 목적이 되는 순간, 상대가 겪는 문제를 이해하려는 필요 때문에 듣는 과정에서 비판이나 반박이 있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공감과 신뢰가 쌓이게 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질문들이 오가며 소통이란 것이 이루어진다. 존중하고 신뢰를 하는 사람 앞에서 불편한 이야기만을 계속하는 사람은 없다. 마음을 열게 되고 솔직해진다. 그녀는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어느새 나를 신뢰하듯 쳐다보았다.


"아, 씨팔"


너무 마음을 열고 솔직해졌나 봐.


"아, 진짜 우리 오빠 애장품 건들지 말라고! 내가 이거 응모하려고 몇백만 원을 썼는데!!?"


당첨 무효를 외치며, 추첨 과정을 공개하라고 난동을 부린, 그 고객이었다.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맥락에서 벗어난 고집만 부리고 있다. 오해를 푸는 것이 아니라 걸어 잠그고 있다. '듣는 귀'는 결국, 자존감과도 연결된다.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여유와 공감이 자기 효능감과 자존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별 거 없는데, 강하게 보이려고 욕을 하는 것은 자존감이 바닥임을 역설한다.


"자, 이제 얼추 정리된 것 같으니, 우리는 먼저 일어나시죠. 김팀장, 세라 님하고 저는 먼저 나가볼게요. 나머지 마무리 좀 부탁드려요."


인사 팀장에게 뒷정리를 부탁하고 경찰서 문을 나섰다.

고생했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하며 그녀를 위로했고, 그녀의 한숨과 대답과 한탄에 고개를 끄덕이고 긍정해 주었다. 그리고 식사 시간이 훨씬 지난 것 같아서 배가 고프겠어요, 혹시 늦었지만 식사라도 하실까요, 하며 인사치레로 건넨 말에 그녀가 대답했다.


" 식사는 됐고,..."


식사는 됐고, 그녀는 나에게 가볍게 술 한 잔을 제안했다.

듣는 귀가, 마음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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