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인재가 뛰어난 이유
"저는요,... 실장님!"
술 한 잔 마시자고 해놓고 한 병째다. 나는 술잔에 사이다를 채우고, 그녀는 눈을 흘기며 자작을 한다. 또박또박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누가 보면 마치 인생 선배라도 된 양, 호탕하게 웃으며 그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버럭 짜증도 냈다가, 내 등짝만 후려갈기지 않았을 뿐,... 바람이 선선하게 좋은 날, 푸르르히끗한 잔디밭에 앉아 대학 선배가 후배 데려다 놓고 소주병을 기울이며 인생에 대한 담론을 펼치는 듯 남이 보면 그러고도 남을 상황이, 한 동안 지속되었다. 걱정이 됐는지 인사팀장이 뒤늦게 합류했다.
"술이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이제 막 잔하시고, 일어날까요?."
한참을 '듣는 귀' 모드였던 내가 말을 꺼냈다.
"아니요, 한 말씀만 해 주세요. 제가 이 회사 다니는 게 맞나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순간 인사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매우 당황했고, 인사팀장은 당돌한 신입의 만취행위에 겁을 먹고 있었다.
"어떡하냐고요!?.."
"아, 세라님. 지금 이러실 건 아니고, 내일 저와 다시 이야기 나누시죠."
겁먹은 인사팀장이 다급히 거들었다.
"어떡하냐고요, 이모부!"
순간 인사팀장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인사팀장은 매우 당황했고, 나는 당돌한 신입의 만취행위에 겁을 먹고 있었다.
"저기요, 술이 많이 취하셨습니다. 일어나시죠."
나는 눈에 힘을 준 채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얼른 일으켜 세웠고, 게걸음 걷듯 의자와 테이블 사이를 비집고 걸어 나왔다. 당황한 인사팀장은 나에게 그녀와 무슨 관계인지 놀란 눈 짓으로 되물었다. 술이 많이 취한 것 같네, 이모부가 나와 비슷하게 생겼나 보네,라고 혼잣말을 하며 넉살 좋게 웃었다. 순간 식은땀이 송글 맺혔다.
사실 그녀는 나와 머나먼 정글보다 더 멀고 싶은 (가족)이다. 처의 조카,라고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너무 가까워 보이니 정정하자면 아내의 사촌 언니의 딸,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아내의 당숙의 딸의 자녀'가 되시겠다. 이 정도면 나와는 잘 몰라도 되는 남이고, 실제 왕래가 없었다면 그냥 남처럼 지내도 될 만한 사람이 아닌가. 이모부라니. 난 너 같은 조카를 둔 적이 없어요.
"실장님, 저 진짜 이러면 다시 공채 준비할 겁니다."
나는 그녀의 (대기업) 공채 준비를 막아 본 적이 없다. 들은 바에 의하면, 2년 동안 대기업 입사를 위해 많이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는 것, 우리 회사의 입사는 사실 원했다기보다 잠시 쉬어가는 차원에서 지원한 것인데 덜컥 합격을 하게 되었다고. 그녀가 회사에 입사한 후 한창 뒤에 알게 되었다. 혹시라도 모르니, 어차피 몰랐던 사실이고, 결혼식 이후 한 두 번쯤 뵌 사촌 언니는 그렇다 쳐도 그분의 딸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니 오해살 필요 없이 아는 척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처와 합의를 봤다. 팔자에도 없을 것 같은 처조카와의 인연. 어쩐지 이상하게 초기부터 눈에 밟히던 그녀였다.
한숨을 한번 쉬고 자리 끝에 걸터앉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공채 준비를 하는 것은 본인 의지에 달린 문제입니다.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세라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가.입니다. 저번에도 이야기했듯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앞으로 할 일들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업무들입니다. 다양한 경험이 곧 능력이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요. 당장 1~2년은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뭔가 전문적인 것 같고 나아 보이겠지만, 3년 차 정도부터는 중소기업의 인재가 일을 더 잘하는 게,... 확실히 느껴집니다. 중소기업의 인재는 멀티플레이어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보니 활용성이 높거든요.
사업의 규모나 카테고리마다 다르겠지만, 보통의 대기업은 분업화가 잘 되어 있어서 본인 일 말고는 다른 것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게 장점이죠. 하지만 자신의 업무 외적으로 도움을 받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나무만 보니 숲을 보는 게 익숙하지 않을 때가 있죠. 업무가 디테일하게 나뉘다 보니 소통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내 일, 남 일을 나누게 되고, 사고 한번 터지면 내 탓보다는 남 탓으로 돌리게 되고. 부서 이기주의는 분업화가 잘 된 회사일수록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반면 중소기업은 그 반대죠. 일이 많습니다. 작은 회사일수록 내 업무 말고 다른 업무들도 어쩔 수 없이 챙기게 됩니다. 이것을 불평불만을 갖고 대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잘 생각해 봐요. 그만큼 이 일 저 일 많이 배우는 거예요. 그리고 사고가 터지면 내 탓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남 탓할 시간에 업무 해결에 초점을 맞추게 되죠. 자연스럽게 문제 해결 능력까지 학습됩니다.
대기업 인재와 중소기업 인재의 성장 곡선은 확연히 다릅니다. 중소기업에서 3년 정도 보내면, 업무의 요소요소는 물론이고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사업의 규모는 다르겠지만, 결국 기획자나 PM(Project Manager), PL(Projectr Leader)의 역량을 큰 조직에서 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배울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세라가 대기업에 가고 싶다는 말에는 스스로 왜?라는 질문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대기업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대기업을 선호하는 것은 아닌지, 본인 인생 안에서의 그 가치를 저울질해 보라는 이야깁니다. 대기업이 목표이고 그것이 곧 가치라고 판단되면, 그리고 가야 하는 이유가 확실히 정립되면, 그때 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신입 공채로 지원할지, 수시 경력 지원으로 할지. 지금 상황에서 저라면,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3년 동안 익히고 배우고 단련시켜서 큰 기업으로 나아가면 아마 같은 3년 차 사원들 중에서도 눈에 띄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보기 좋은 대기업 타이틀과 명함을 자신과 동일시시키는 우를 범하지 마세요. 많은 사람들이 명함 뒤에 숨어서 본인의 능력을 과장시킵니다. 머리를 써서 공부하는 것과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은 본질 자체가 달라요. 그런 관점에서 사실상 기업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죠. 물론 철저하게 개인의 "성장" 관점에서 이야기한 거예요. 그것이 아니면 절대적으로 대기업이 많은 부분에서 더 훌륭할 겁니다."
머릿속에 흐르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이야기하다 보니, 말을 마치고서야 그녀를 제대로 쳐다봤다.
앞쪽으로 쏠린 긴 머리카락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벌건 낚지 볶음을 좌, 우로 쓸고 있었다. 물티슈를 꺼내어 머리카락을 닦아내려고 하자 고개를 드는 그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잘 들었다는 듯이 씩 웃어 보인다. 어디까지 들었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자, 이제 진짜 일어납시다."
그날 내 이야기를 잘 들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버텼고, 시간이 흘러 '대리'로 승진했다. 나 또한 회사의 중책을 맡게 되면서 실무적으로 더 이상 그녀와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다. 평가 기간에 평범한 평가를 받는 정도의 직원으로 부서장을 통해 듣는 이야기가 다였다. 그럴 때마다 가족으로 엮이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밀어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 아주 조금 있었다. 그래도,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협박하는 건 아니지. 정말 나는 그날 카페에서 묻고 싶었다.
우리가 남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