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소년의 세계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었던 것처럼.
슬의생을 끝까지 다 보았다. 한마디 더 붙이고 싶은 것은 '응답하라' 시리즈와 '슬의생'은 꽤 단짠 조합이 꽤 좋은 것 같다는 점이다. 사실 지나치게 선한 캐릭터극은 지나친 악인이 많은 극만큼이나 심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들은 부모님이 늙어 가는 것, 환자가 죽어 가는 것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 한계, 비극성을 주로 극의 앞 뒤에 배치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드라마는 단지 가벼워 보이지 않고 무언가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담고 있기도 하다. 슬의생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시간이 아깝다'라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기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은(혹은 그런 사랑의 관습을 지키기에만 애쓰는 것은) 이미 중년에 들어선 그들에게는 쓸모없는 정념의 낭비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에 응답하라 마지막 시리즈의 메시지는 부모님이 늙어 가신다, 그리고 너희도 늙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의외로 직설적으로 비극성을 드러낸 응답 하라의 마지막 쌍문동 장면은 꽤 도전적이고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배치가 곱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노련한 작가가 왠지 적절히 퇴행하기 위한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삶과 죽음을 적절히 마케팅한 것은 종교였다. 모두가 죽는다는 비극 앞에서 어떤 모순들도 하찮은 것들이 될 수 있다. 이 드라마에서 마뜩지 않았던 삶의 단순화, 퇴행은 이런 삶과 죽음의 맥락 혹은 쇠약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적 한계 앞에서 정당화되는 것이다.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며 모든 의제 역시 평등해진다.
시간이 아깝다는 것 역시 그런 맥락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말고 어떤 것도 별 의미가 없다는 가족극적 맥락의 마무리이다. 연예서사의 과잉은 한국 의료드라마(???)의 고질적인 병폐이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따지면 한국사회가 가족드라마에로의 지나친 구심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좀 과감하게 이야기하면 복지의 원천이 가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그런 면에서 '하얀거탑'이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야망에 가득 찬 천재 외과의 장준혁이(김명민 분) 왜 권력자 부원장을(김창환 분) 거스를 수 있는 환자를 건드렸냐며 묻는 노회한 개인 병원원장 장인에게 대답한 것은 '드문 수술이라서, 해보고 싶었다'라는 대답이었다. 장인은 '그 정도의 열정은 있어야지 과장이 될 자격이 있지'라며 웃어버린다. 권력욕의 화신에게도 순수한 의학에 대한 열정이 있으며, 사위를 통해 권력욕을 대리하고 있는 철저한 속물 의사에게도 권력의 원천에 어떤 순수성이 숨어 있음을 간파할 통찰력이 숨어 있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슬의생이 나아가 그 시리즈가 혹은 나영석의 예능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캐릭터가 있을 뿐 인간이 별로 들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마치 소년의 세계에는 어떤 갈등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기에 그 속에는 사건이 있을 뿐 모순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모순은 사회라는 것이 성립하기 위한 기초 같은 것이다. 계약이든 법적 강제이든 간에 대립되는 이해관계가 사회를 만든다. 그런 면에서 소년적 캐릭터로 가족 드라마로 퇴행하는 것은 사실 사회를 지우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희로애락은 바로 그 사회라는 자장 안에서 겪는, 겪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나영석의 예능은 같은 맥락에서 캐릭터와 우정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무한순환되는 '연예인'성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닐까?
최근 '뿅뿅 지구 오락실' 에 대해 생각해 보다 이전에 썼던 글을 꺼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