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으로 향하는 길
여느 때처럼 뉴왁 공항에서 뉴욕을 가기 위한 싼 교통편을 찾았다. 뉴왁공항은 뉴욕을 가기 위한 공항이지만 엄밀하게 보면 뉴욕이 아닌 뉴저지였다. 그래서 뉴저지, 뉴왁 펜 스테이션을 거쳐 뉴욕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았다. 공항버스가 16이었는데 4.3 정도에 갈 수 있으니 비용 절약이 되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여행 안내서에 나와 있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검색해 보고 찾은 samtrans를 타고 2.5에 들어가기도 했다. 아껴 쓰는 여행에 익숙한 가난뱅이 근성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왠지 이게 즐거웠다.(이런 정서가 즐겁다는 것이야 말로 도시빈민적 아비투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안내서와 인포메이션에서 말해주지 않더라도 그곳을 자주 이용하는 현지인들이 그 돈을 일상적으로 지불하며 다닐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어딘가에는 여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숨통이 트여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루트라도 있지 않겠는가.
뉴왁을 향한 62번 버스 안의 풍경은 샘트랜스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여행객이 없었고, 계층적으로 편향되어 있었다. 승객들은 흑인과 히스패닉 무엇보다 노인들이 많았다. 다들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의 비슷한 경우에 비하면 다들 훨씬 잘 웃는 것 같았다. 도심으로 들어가는 외곽버스의 풍경이 그러하듯 듬성듬성 중고자동차 거래장이나 때로는 부서진 건물등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버스가 뉴왁 시내에 들어서는 순간 적지 않게 놀라게 되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한 때 활기가 있었지만 쇠락한 탄광도시 같은 분위기의 도심이 펼쳐졌다. 잘 정돈되어 있지만 더 개발될 것 같지는 않은 집들과 아무렇게 달아버린 듯한 간판들이 앙상하게 이어졌다. 샌프란시스코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도시인가를 되새기게 되는 모습이었다. 마치 낭만적인 샌프란시스코 관광을 마치고 숙소 근처에서 산책을 하며 만나게 되는 많은 노숙인들처럼 말이다. 아침에 만난 노숙인들은 신진대사가 활성화되어 있어 그런지 거리에 일을 보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뉴왁 펜스테이션에 내려 처음으로 들어간 맥도날드는 좀 더 강렬한 느낌이 있었다. 미국에서 만난 버거킹이나 맥도날드는 지역에 따라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노인들이 적당히 싼 버거로 시간을 때우는 그런 곳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재팬타운 근처의 버거킹에서 본 인상은 그러했다. 큰 몸을 가진 흑인 아주머니가 음식에 불평을 하고, 동남아 계로 보이는 점원은 익숙한 짜증스러운 반응을 하는 그리고 노인들이 음료 한잔을 들고 긴 시간 앉아 지켜보는 그런 곳이었다. 그날 3.73에 작은 햄버거 2 프랜치프라이 음료까지 마셨다. 그런데 펜스테이션 맥도날드는 좀 더 험악한 느낌이 있었다. 홈리스 한 사람이 사이를 돌아다니며 구걸을 했고, 굳은 얼굴의 몇몇 늙은 흑인들이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윤기가 빠져 말라버린 버거킹이 같았다. 주문대 근처에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상황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강력한 외부의 힘이 없다면 터질 수도 있겠다 싶은 그런 에너지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해변의 노숙인들이 들고 있던 손팻말 ‘why lie? I need weed’ 과는 완전히 다른 기운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맥모닝을 먹었다. 빵대신 비스킷으로 쌓여있는 계란과 베이컨이 무척 크고 짰다. 갑자기 뉴왁공항에서 보았던 대통령, 트럼프의 연설이 떠올랐다.
짧은 시간 미국을 스쳐 지나가며, 미국 사회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여행은 인상을 쌓고 분류하며 정서적 반향을 얻는 활동이다. 며칠간 느낀 인상을 그저 말하자면 미국은 대마와 노숙의 자유가 있는 곳이라는 표현을 해 보고 싶다. 미국은 거의 대마가 일상화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마가 합법화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거리에서 너무 쉽게 대마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지금 브루클린 에어비앤비에서(주인장은 나이지리아 사람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진한 대마냄새가 풍겨온다. 대마를 자유화한 나라는 무엇일까?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노숙의 자유란 노숙을 할 수 있는 자유와 노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모순일 것이다. 미국 다운타운에는 많은 노숙자가 있다. 버스를 타도 어렵지 않게 노숙자들을 보게 된다. 이는 분명 심각해진 빈부격차와 미흡한 복지시스템과 관련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편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한국은 노숙자들이 보이지 않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싫은 거추장스러운 무엇이라면 그것이 사람이든 무엇이든 존재를 치워 지워버리는 것이다. (최근 보안이 강화된 고층아파트 단지들의 경향을 보면 한국의 치안 상황이 나빴다면 어쨌을지 끔찍해진다.)그런 시선들 속에서 노숙인들 스스로도 자신을 숨기게 된다. 이곳 노숙인들을 낭만화하는 것이 아니다. 길에서의 삶이라는 것이 어찌 낭만적 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분명 그들은 한국사회의 노숙인들에 비해 당당했다. 그들은 사회시스템 속에서 밀려났지만 죄인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도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우리들 눈에 그들이 보인다는 것이 중요하다. 공공기관 앞이나 어느 사거리에서도 사람들은 쉽게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사회는 위선적이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사는 것이 사람들의 삶이긴 하지만...
2017년 중남미 여행을 하며 쓴 글들을 순서대로 꺼내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