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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 Apr 14. 2023

쿠바, 트리니다드 이튿날

quiero algo

트리니다드의 둘째 날. 까사 주인이 조식을 준비해 옥상에 차려주었다. 숙소 주인이 만만치 않아 조식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선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까사주인이 옥상으로 음식을 들고 올라오는데 접시를 들어 옮기며 ‘quiero algo hacer'(직역하면 할 수 있는 뭔가를 원한다)라고 얘기했다. 만만치 않은 아주머니에게 약간의 표정의 변화가 보였다.


 어젯밤 두 번 정도 이해하고만 넘어갔던 스페인어 책을 헤드 랜턴을 켜고 집중 공부했다. 핌슬러가 내 입에 밀어놓은 구문들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알고 싶어 샀던 오래된 빨간 ‘기초 스페인어’ 책이었다. 생활에서 직접 부딪히다 보니 책에 들어있는 다양한 표현들이 어느 순간에 쓸 수 있는 표현인지 여러 가지 상황에서 유용한 단어들을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hacer(하다). 어제 터미널에서 아바나행 버스시간을 물었는데 시간을 알아들었는데 오전인지 오후인지 묻기가 힘들었다.(tarde는 알았는데) 시간 표현들을 바로 다시 찾아보았다. 어젯밤에 눈에 들어왔던 동사는 llegar(도착하다) ver(보다) empezar(시작하다). 순서대로 말하면 되는 스페인어의 특성상 동사를 알면 명사는 하나씩 채워가면 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핌슬러가 가르쳐준 querer(원하다)  동사만큼 유용하게 쓴 동사는 없었다. 우리는 뭔가를 언제나 원한다. 물을 원하고, 먹기를 원하고 계산하기를 원하고, 알기를 원하고, 때로는 너를 원하기도(te quiero) 한다.


 사실 트리니다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좀 당황스럽긴 했었다. 버스는 무려 8시간을 달려왔고 짐을 내려주시는 분은 돈을 요구했다. 하지만 연세가 있으셨던 아저씨는 아바나 비아술 터미널의 화장실 앞에 있었던 아주머니처럼 노골적으로 강요하지 않았다. 내리자마자 호객하시는 분들이 몰려들었다. 호객을 피해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한 아주머니가 거의 온몸으로 바디체킹을 하시며 여러 동양권 언어로 되어있는 글을 들이밀며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냥 보기만 하라고 했다. l은 조건은 괜찮다고 했다. 얼마나 걸리냐고 했는데 1분이면 된다고 했는데 5분 걸렸고, 언덕 쪽으로 숙소를 구하려 했는데 점점 지대가 낮아졌다. 거절하는 말을 했으나 왔으니 보고 가라고 해서 보았다. 집은 그럭저럭 깔끔했지만 방이 작았고 조식 미포함 20 cuc로 가격도 그냥저냥 했다. 트리니다드는 전망위주로 방을 구하려 했었다. 괜찮다고 하자 가격이 바로 15로 낮아졌지만 거절하기로 하고 원래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바로 이 숙소 주인이었다. 산으로 가는 언덕배기 중간에 동네사람들과 앉아있었던 분이었다. 책에 나와있던 숙소를 가야 했는데 근처에서 그냥 그녀를 따라가게 되었다. 영어를 하지 않았고,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하룻밤에 20 cuc였는데 방은 꽤 깔끔하고 에어컨이 있었다. 발코니가 목적이었는데 2층 옥상에 올라 바라본 풍경은 꽤 괜찮았는데 조금 아쉬운 정도였다. l과 얘기하며 20에 조식 있으면 나는 ok라고 했고, 그는 그러자고 했고, 말이 잘 통하지 않아 한번 정도 더 확인했다. l은 나는 ok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고 이틀밤 40을 받아 든 그녀가 지폐에 정열적으로 입을 맞추는 것을 보았다. 강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만만치 않은 인상이었다. 그런데 돈도 먼저 주었으니 패를 다 까버린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옥상에서 본 풍경은 멀리 나무에 가려 약간은 아쉬운 데가 있었고, 왠지 옥상에서 노래를 부르며 잘 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떡이 보이기도 했다. 그 옥상 테라스가 아마 론리 플레닛에 소개된 곳이 아니었나 싶다.


다행히 조식은 꽤 훌륭했다. 주스에 과일 오믈렛 빵 버터 우유 커피 정체불명의 스낵까지 상당히 잘 갖춰져 있었고 맛도 있었다. 숙소는 결과적으로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잘 꾸며진 까사의 바로 위쪽 집들은 산동네의 무너져내려 버린 지붕들이 얼기설기 이어져 있었고, 까사 건너편 집에서는 늦은 밤까지 카세트로 지금 현재의 쿠바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좋았다.


트리니다드는 밤의 음악공연이 유명한데 옥상 라이브는 솔직히 흥겨워서 멋진 풍경과 어우러져 들어줄만했지만 음악이 되지 못한 음악이었고, 몇 블록 아래의 여러 공연장들은 꽤 괜찮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었다. 아바나에서 미술관을 한번 들려봐야겠다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하지만 어제저녁에 들어온 나는 트리니다드가 분명히 아름다운 곳이지만 적당히 흥청거리는 이곳이 바로 정감이 가지는 않았다. 마치 분위기가 좋았던 돌길 사이로 여기저기 깨어져 있는 맥주병들의 잔해들을 보고 있으면 편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공연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광장에서 아무렇게나 앉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분위기는 좋았지만 지나치게 관광지화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조식을 먹고 접시등을 치워 아래로 내려다 두었다.  l은 잠시 후 자고 싶어 했고, 산 위에 있는 전파송출탑은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그래서 간단히 차려입고 나가려는데 숙소주인이 꽤나 친근하게 이것저것 추천도 했고, 나도 다녀와서 앙꼰해변에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가벼운 스킨십을 하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숙소는 가이드책에 나와있던 송신탑에 오르기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 입구까지 가는 길에 트리니다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이 눈에 들어와 좋았다. 아바나 센트로에서도 자주 보았듯 산기슭에는 불현듯 갑자기 부서져버린 집들이 나타났고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는 센트로 빈민가에서도 보았듯 정신없던 잔해들이 어느샌가 치워져 있었다.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자 태양이 무척 뜨겁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높은 곳은 아니었기에 별일이 있지는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칫하면 일사병에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햇볕은 따가웠다. 조금 걷다 나는 가방에서 얇은 바람막이를 꺼내 그 모자를 썼고 몸을 감쌌다. 직사광선에서는 머리와 몸을 가리고 땀으로 체온을 낮추는 것이 훨씬 시원했다. 사막에서 몸을 감싸는 원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다 잠시 구름이 끼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바람막이를 벗고 땀을 말리며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15분여 산길을 올라가니 정상직전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늘이 널찍해서 쉬어가기 좋은 곳이었고 한 여자분이 나무 아래에 앉아있었고 다른 남자 여행객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별 이유 없이


 esta libre?(이 자리 비었어요?)


 라고 얘기해 버렸다. 공항도 노천카페도 아닌데 자리 비었는지 물어볼 필요는 없지 않았겠는가? 두 사람은 바로 웃어버렸고 옆에 말똥을 가르치며 조심하라고 했다. 둘 사이의 대화에 끼지는 않았지만 괜히 실없고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여행 욕구는 내게 일종의 퇴행일 수도 있다. 새로운 나라 도시를 갈 때마다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먹고 자고 이동하는 것을 다시 배우는 것이다. 고도로 복잡해진 인간사로부터 벗어나 먹고 자는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의 경우 이왕이면 더 싸게 생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내 안위와 생활에 대한 최소한의 안정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된다면 인간은 무엇을 하는가? 다른 사람의 기분을 느끼고 가벼운 농담이라도 던지며 공감을 하는 것이 아닐까? 딱 거기까지만.


나무 아래에서 한참을 이야기 나누고 있는 두 여행객을 지켜보며 서양 여행자들은 여행이 생활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각자의 방식으로 편안하게 놀러 온 사람들. 가끔 한국 장기여행자들을 보면 몸에 바람이 깊이 묻어있는 것 같은 사람들을 종종 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 왠지 조금은 쓸쓸해지곤 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불편함 들은 대체로 외면하고 있던 인생의 본질에 가까운 것일 경우가 많다.  


전파 통신탑에 올랐다. 오르자마자 철조망 건너편에서 사무실에 앉아있는 사람이 말을 건다. 오라고 한다. 경계심이 있는 편이라 그냥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전파 통신탑이면 공영일 텐데 그럼 거기 직원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그곳이 당신의 사무실인지 물었다. 그랬다고 했고 물을 권했다. 얼마냐고 했는데 2 cuc라고 했다. 솔직히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목도 말랐다는 행복회로를 가동했다. 그리고 큰 통의 물을 받기 위해서는 작은 물병도 필요했다.


그는 그 돈을 받고 나를 뒤로 안내했고 그 속에서도 전망이 좋은 곳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정말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멀리 바다도 보이고 그 바다로 가는 길에 펼쳐지는 초원들의 생태들도 멋있었다. 그리고 더 가까이에는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초원과 마을 사이의 집들이 나무와 식물들에 감싸져 있는 느낌도 좋았다. 모든 방향이 다 괜찮았다. 그 물을 사지 않았다면 여기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 입장료라고 생각하자. 다른 여행객 두 명이 얘기를 하고 있었고, 아름답긴 했지만 햇빛이 따가워서 10여분 감상하다 사다리를 내려왔다. 다시 돌아가려다 옆을 보니 철제로 된 계단이 있어 올라보았다. 방금 그곳보다 조금 높은 곳이었고 전파탑이 바로 눈앞에 보이며 파노라마 뷰가 펼쳐졌다. 아까처럼 건물 지붕에 가까운 곳이었는데 그늘도 져 있어 무척 시원했다.


나도 모르게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좋은 풍경 좋은 기분을 강하게 느꼈을 때 나타나는 신호였다. 가끔 나도 모르게 좋아하지도 않던 이상한 노래가 발사되어서 놀라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과 쾌적한 그늘을 찾을 수 있어 그 속에 천천히 영원히 살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나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오래간만에 혼자 다니는 여행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자극을 받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편이다. 새로운 자극을 통해 내 인지를 재조직하고 쾌락을 얻는다.


며칠 전 모로 요새 부근에서 오래간만에 음악을 틀었던 일이 있었다. 꽤 아름다운 곳이었다. 내가 한곡 l이 몇 곡을 틀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피곤했는지 여자친구의 노래는 그나마 들어줄만했지만 변진섭의 곡은 좀 올드하다고 해서 조금 티격대기도 했다. 그런데 전파송신소 그늘 아래에서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제목도 모르는 ‘여자친구’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대부분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는데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노래를 흥얼거린 것은 아니지만 여자친구의 노래 중에 '탕탕탕'이라는 가사가 들어가는 노래가 있었다. 어느 미국 슈퍼마켓에서 들었던 기억은 있는데 왜 불렀는지는 알 수가 없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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