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와 힐링.
오늘은 l과 함께 전파 송출소를 올라갔다. 어제 오르지 못했던 l에게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정열적이면서도 오손도손 아기자기한 트리니다드의 마을 풍경과 저 멀리 아름다운 앙꽁 해변, 마을 뒤편의 산들과 앙꽁과 마을 사이의 목초지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식을 다소 늦게 먹어 어제의 물 강매꾼을 만나게 될 것이 조금 찝찔했지만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말 환전소가 모두 문을 닫아 어쩔 수 없이 하루 더 머물러야 했고 속도를 늦춘다는 차원에서 오늘은 쉬엄쉬엄하기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늘 할 일이 많았다. 비아술 터미널에서 하바나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버스편도 확인해 보아야 했고, 아니라면 콜렉티보 택시와 협상도 해야 한다. 앙꽁해변으로 가는 버스가 모네다도 받는지 받지 않는다면 남은 모네다를 어떻게 지나가는 사람에게 어찌어찌 cuc로 바꾸어야 한다. 또한 앙꽁해변에 가서 노닥거리며 책도 보고 글도 쓰는 간지를 부려도 봐야 한다. 하나하나 말이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전파 송출소로 향하는 길은 역시 인상적이었다. 번화한 관광지 느낌의 트리니다드 시내와는 달리 아무렇게나 무너져있는 집들이 널려 있었고, 사람들 역시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었다. 표정도 밝아 보였다. 날씨가 더워서 좋은 집이 필요 없는 것인지 사회주의 국가라 최소한의 생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호르헤 같은 현지인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었다.
전파 송출소로 향하는 길은 어제보다는 구름이 많아 훨씬 수월했다. 하지만 날은 더워 l은 다소 힘들어했지만 풍경은 아름답다고 했다. 나는 올라가는 길에 그를 다시 만났을 때 할 말을 대략 준비해 뒀다. 직역하면 대충 이랬다.
어제 나는 물을 지불했다. 꼭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오늘은 그냥 보겠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사람이 있었다. 젠장. 그가 그냥 들어가려는 나를 막았다. 나는 비슷하게 얘기했다. 어제 지불했고 안다고. 하지만 오늘의 그는 어제의 그보다는 가차 없고 뻣뻣한 사람이었다. 다만 어제 지불했다는 말이 먹혔는지 올라는 가는데 많은 시간을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quisas, 아마. 우리는 지붕에 올라 잠시 풍경을 보고 있었다. 역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2분도 되지 않아 그가 다시 나타났고, 밑으로 내려오라고 했다. 기분이 나빴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왔다. l에게 미안했다. (그런데 몇 장 찍은 그 사진은 무척 잘 나와 만족스럽긴 했다.) 밖은 괜찮다 해서 문 바깥에서 버팅기며 한국노래도 몇 곡 틀고 있었는데 그도 익숙한 최근 쿠바 노래를 틀며 영역표시를 했다. 우리 뒤에 다른 양인 커플이 들어갔는데 아마 돈을 낸 것 같은데도 금방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돈을 빨리 걷고 강제로 안내를 한 뒤 귀찮지 않게 사람을 빨리 그곳에서 내보내는 것 같았다. 어제의 그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여행자에게도 간섭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어제 강매를 할 때도 샤이한 맛도 있었다. 오늘 그를 다시 만났다면 괜찮았을 것도 같다.
하여간 잠시 시위를 하다 전파송출소에서 조금 떨어진 큰 나무아래로 가서 노래를 들었다. 이틀 연속 밤에 스페인어를 공부하거나 글을 쓰느라 잠을 덜 잤더니 평소 좋아하던 복잡한 노래들이 싫었다. 여러 노래들이 마음에 들지 않다 프린스를 듣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노래를 지우고 떠난 것이 아쉬웠다.(16기가 아이폰 극혐) 같은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그냥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너무 좋았다. 확실히 여행은 한 곳에서 충분히 음미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튜닝해 집어넣는 시간이 중요한 것 같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고 노닥거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50대 후반 정도의 서양인 부부로 보이는 커플이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다시 올라가려는데 l이 주의 사항을 줬다. 위의 한 친구가 당신을 귀찮게 할 것이라고.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는데 내지 않는다면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그렇게 몇 마디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1년간 세계여행을 하는 호주인 부부였다. 남편은 한국에 일로 와본 적이 있다 했고, 나는 많은 사람들이 호주에 가고 싶어 한다 했다. 자신들도 마을에 한국 사람이 살고, 아이들 친구도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친구를 잘 사귄다고 했더니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일은 영어로 대화를 하는 그 10여분의 시간이 너무나 힐링이 되었다는 것이다. l역시 같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나는 영어가 너무 친숙하다고 그들에게 말했고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배워줘서 고맙다고 했다. 역시 좋은 분들이었다. 이름은 쥴리와 빌이었는데 다음으로 가게 될 크로아티아에 가봤던 내 경험을 얘기해 드렸고, 긴 여행을 할 때의 호흡에 대해서 얘기해 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을 낯선 스페인어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한편 재미있기도 하고 도전적이면서도 알게 모르게 힘들었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영어가 너무 듣기 편했고, 쥴리와 빌리의 영어는 알아듣기 쉬운 발음이었다. 언어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영어가 함께했던 미국, 캐나다가 주었던 사회적 인프라와 흥정이 필요 없는 거래의 투명성 그리고 서구적 교육을 받은 정서적 동질성 같은 것도 느꼈던 것 같다. 재래시장에서 정가가 붙어있지 않은 쇼핑을 힘들어하는 우리로서는 모든 것에 흥정을 해야 하고, 모네다와 세우세를 끊임없이 변환하며 확인해야 하는 것이 익숙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 여행에서는 영어를 쓰는 것이 너무 힘들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thanks, Hwajin Son
뒷산을 내려오면서까지 l과 몇 번이고 대화가 너무 좋았다고 서로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오늘 일은 술술 풀린 감이 있었다. 집에서 잠시 쉬다 앙꽁해변으로 가는 버스 기사를 만났고 스페인어로 우여곡절 끝에 모네다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쓴 표현 중에 가장 복잡한 표현들을 말했다.
모네다로도 지불가능한가? 충분히 모네다를 가지고 있지만 세우세가 없다. 그게 우리 문제다.
가능하다고 했다. 고맙다고 했다. 비아술 터미널에서는 하바나 터미널에 적힌 시간표가 맞는지 확인했고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앙꽁해변을 가기 전에 콜렉티보 택시 호객하시는 분에게 인당 25 cuc면 가능하다고 했다. 다시 탔던 해변 가는 이층 버스길은 너무 아름다웠고 사진을 찍을 필요가 없어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해변에서도 수영이라 부르지 못할 물놀이를 충분히 했고, 해변에서 기록도 남겼다. 돌아와서 어찌어찌 택시도 예약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행복하게 끝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