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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샘 Sep 05. 2023

장애인식개선

보이지 않아 보게 된 세상#12

<보이지 않아 보게 된 세상>


Chapter12. 장애인식개선     


'함께'이기 위해서는 상대방만이 아니라 '나'도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사무직과 비사무직에 관계없이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들어야 할 법정 의무 교육 중에 '장애인식개선교육'이라는 것이 있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어떻게 해야 함께 사회를 꾸려나갈 수 있을지 등에 대해 교육을 해주는 강의이다. 나도 일을 하고 있다 보니 해당 교육을 매년 들으면서 새삼 깨닫는 것들이 있다. 사실 어떤 장애가 있는 경우 본인의 삶이 좀 팍팍하다 보니 다른 장애를 가진 분들의 삶이 어떠하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오히려 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런 부족한 부분들을 이 교육을 통해 많이 배웠는데 교육과는 별개로 내가 생각하는 '장애인과 함께 하는 사회 만들기'에 대해 살짝 적어보고자 한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이것은 그저 나의 소견일 뿐이다.  '니까짓 게 뭔데 이런 얘길 하냐!'라고  적절한 질문 겸 질타를 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지만 브런치에서 나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친구들과 모여 이야기하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 확실하기에 용기를 내어 적어 본다. 하하하하 (왠지 눈에서 땀이....)   

        

사실 장애인과 함께 하는 사회의 첫걸음은 '장애인을 바라보는 눈길'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이 부분은 사실 어마어마한 발전을 보여서 우리 선배님들이 지내 온 어렵고 춥고 배고팠던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식당이나 카페 등 가게에서 첫 손님으로 시각장애인을 받으면 '재수가 없다'라는 생각이 만연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네에 발달장애 친구가 있는 경우엔 '바보'라고 놀리면서 따돌리는 일들이 허다했다고 하는 수많은 전설들이 내려온다. 이런 얘기들을 들어보면 우리 사회가 참 많이 성숙했구나 싶다.     

  

최근에는 이런 도덕적 관념을 스페이스 X에 태워 화성으로 날려버린 듯한 이야기는 현실에서 잘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물론 내가 아무것도 모른 체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대신 측은지심이 발동되셔서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들은 여전한 듯싶다. 사실 그 시선은 착한 마음씨의 표현이고 그만큼 그 사람의 인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뭐라고 지적할 일이 아닌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길에서 다른 성별의 사람을 보고, 다른 연령대의 사람을 봤을 때 측은해하지 않고 안쓰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같은 선상에 있는 존재로 바라봐 주길 조금 더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시선의 수정이 있어야 그다음 스텝에 대해서 좀 더 수월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듯 싶다.  

    

왜냐하면 그다음 스텝이란 것이 바로 직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이 이야기를 살짝 하기 위해 서두를 기~~~일게 뽑았다. 하하하. 눈에 뵈는 게 없이 직장 생활을 한 지 9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데 나 또한 아직도 어떻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생해야 하는지에 대해 감을 잡기가 쉽지 않다. 물론 교육자료 같은 데서는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고 있다.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부여해 주고, 하기 어려운 일은 비장애인이 서포트해주고, 장애인은 또 힘을 내서 비장애인이 해야 할 일 중에 도와줄 수 있는 일들을 지원해 주고, 그래서 서로 상부상조하여 화합의 장을 만들고 우리 회사 만만세를 만드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답이다. 하지만 무수한 수포자(수학포기자)들이 그렇듯이 공식을 알려준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 현실이다. 수학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이 공식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아야지 그때서야 비로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장애인과 더불어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마치 수학 공식과도 같은 추상적 해답만을 들고 있어서는 매일의 케이스에서 혼란이 오게 되고 만다. (물론 요런 점은 나 같은 범인의 경우이고, 식견이 탁월한 사람들은 추상적인 답만을 가지고서도 매 사례에서 적절히 대처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아직 정확히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지 누군가 물어보면 물음표가 더 많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기왕 이렇게 시작한 글이니 나의 경험을 가지고 살짝 얘기해 보려 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장애를 가지고 일을 하는 경우에도 돈이나 권력이 있다면 훨씬 수월해진다. 고위직에 있다면 부하 직원을 통해 본인이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되기 때문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부럽다. 하하하하. 하지만 우린 대게 그런 권력과 돈이 있는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동료의 힘을 빌어야 한다. 우선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과의 관계는 결국 신뢰이다 보니 "저 사람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일도 도와달라고 하던데."라는 인식이 주변 사람들에게 심어져서는 곤란하다. 기본적인 마인드는 '남이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다'이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잽싸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이 도면을 봐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면 이건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재빠른 도움 요청만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조치이다.    

  

그리고 많이 알아야 한다. 내가 들은 장애인식교육들에선 장애인이 부족하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임을 강조한다. 동등한 인격체이고 이상하게 바라봐서는 안 되는 것도 맞지만, 비장애인과 비교했을 때 장애인이 부족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동료들에게 도움을 받기만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개선된 상황을 만들자면 우리가 지닌 물리적 약점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구비해야 한다. 이렇게 지식을 장착하고 나면 동료들이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드바이스를 해 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팀 단위로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할 경우에도 좀 더 예리하게 반응할 수 있다. 심지어 격무에 시달리는 동료를 도와주는 일이 발생했을 경우에도 관련 지식이 있으면 훨씬 수월하게 지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건강이 따라준다면 주변인물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공부하고 정리하고  쌓아가는 일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장애가 있다는 것은 참 불편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 불편하고 힘듦이 행복을 갉아먹지는 못한다. 흔히들 생각하고 예전의 위인전기에서 많이 나오던 표현처럼 '장애를 극복'했기에 더 큰 행복과 기쁨을 맛본다거나 하는 그런 관점은 아니다. 장애는 장애이고, 행복은 행복인 것이다. 옛날처럼 장애를 극복한 사람들만이 행복을 가질 수 있는 시대라면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평생 좌절과 우울 속에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아닌 것이다.'장애가 있다'와 '행복하다'는 공존가능한 현상인 것이다. 


'장애가 있다'를 마음속으로부터 긍정하게 되면 동료들과 함께 하는 일도 좀 더 수월해지는 것 같다. 처음에는 과한 친절이나 배려에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왜 이리 오바야.'하고 생각되지만, 긍정이 작용되면 친절한 동료들에게 고마움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럴 때, 요렇게 해주세요.'하고 상호 간의 조율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회에서 나의 자존감을 찾고,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바들을 해나갈 때 '행복'이  옆에 머물게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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