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 보게 된 세상 #11
Chapter11. 코로나가 불러온 악재
'악재'를 '선재'로 바꾸기 위한 필수조건 '공감'
2020년부터 3년여간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바이러스는 사람들의 일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내 나름으로 축약해 보자면 '미래세계로의 진입이 이루어진 시대'라고 정의해보고 싶다. 존재는 했지만 활성화되지는 못했던 SF영화에서 보던 화상회의의 일상화가 이루어지고, 비대면 문화와 더불어 '서빙 로봇'의 보급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코로나19'때문만은 아니지만 내연차에서 전기차로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났고, 'Chat GPT'와 같은 진화된 AI세상이 열리기도 했다. 사람들의 속은 어찌 되었든 외양으로는 우리가 그리던 미래의 세계를 이루어내게 된 것이다.
세상은 참으로 살기 좋아졌지만, 장애인을 비롯한 노약자들에게는 이런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이 버거운 것 또한 사실이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어서 나 먹고살기도 힘든데 주변의 약자들을 챙길 여력이 생기겠는가? 일견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기본적인 명제에 동의를 하는 사회라면 약자들도 함께 전진할 수 있는 '배려'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코로나 시기 이 '배려'가 나에게서 멀어졌음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키오스크'의 대대적인 등장이었다. 코로나 시기 비대면 문화가 활성화되고, 자영업자분들의 어려움이 커지면서 인건비 절약 등을 위해 그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키오스크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 키오스크라는 녀석은 상당히 냉담하여서 우리에게 어떤 말도 해주지 않는다. 주로 소리를 듣고 행동하는 우리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천적인 셈이다. 그리고 촉감도 없다. 뭔가 버튼이라도 있으면 그걸 활용해서 도전정신을 길러가며, 뒤에 줄 서 있는 분들에게 쌍욕 들어가며 조작에 도전이라도 해보겠는데, 터치스크린이라니... 실로 상극인 녀석이다. 덕분에 식당이나 카페에 혼자 가서는 뭐 먹기도 쉽지가 않다. 옛말 틀린 거 하나 없어서 '먹고살기가' 이리도 힘든가 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혼자 식당에 가게 되는 경우가 있고 그곳에서 키오스크를 도전해 본 적이 있다. 도전의 결말은 처참했고, 나는 결국 직원분을 찾아 공손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이쪽에서 결재를 해도 되겠냐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무지한 내가 헤아리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테지만, 은행 현금입출금기와 같이 음성 지원 기능을 탑재한 키오스크가 있다면 좀 더 많은 사회의 구성원이 '더불어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키오스크도 우리를 먹고살기 힘들게 만든 악재이지만 좀 더 직접적이고 충격이 큰 악재는 회사에서 일어났다. 회사가 아무래도 구청이다 보니 코로나19로 인해 새롭게 생겨난 업무가 어마어마했다. 방역, 선별진료소, 지원금 지급, 경제 회복 등 코로나 시기 공공부문의 역할은 십여 년치를 압축해 놓은 것 정도의 밀도가 있었다. 덕분에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나도 이리저리 휩쓸리며 많은 일들을 해나갔다. 물론~~ 내가 선별진료소에 나가서 근무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우리 아내가 말하길 "니가 거기 나가면 널 돌보느라 전력에 구멍이 생긴다."라고 했고, 나 또한 그 말에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그리고 직장 동료들 또한 듣지도 못한 아내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여서 인지 나를 이끌고 선별진료소에 근무를 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2인 1조로 이루어져 방역점검을 다니는 일이나 지원금 서류를 검토하는 일 등은 나도 함께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것만 해도 야근과 주말 근무를 해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일상업무도 진행되어야 하다 보니 이건 뭐 6.25 때 이후 오랜만에 겪어보는 난리통이었다. 그 덕분이랄까?? 젊은 직원들은 많이도 퇴사했고, 공무원의 인기는 자유낙하 수준으로 곤두박질쳐서 노량진 상인들의 생계까지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우리 조직에서 반역자로 취급되어 회사 생활이 곤핍해질 수 있으므로 이 정도에서 말을 넣어두고자 한다.(절대 내 필력이 부족하여 유연하게 써나갈 자신이 없어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하하하;;;;; )
취약계층에게 급격한 변화가 악재인 것은 꽤나 맞는 것 같다. 그러나 변화가 두렵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자리보전만을 하고 있어서는 정작 보전하고 싶은 그 자리마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놓치게 되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그럼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악재를 선재로 바꾸는 일뿐이다. 그리고 이'선재'만들기는 어느 한 집단만의 힘으로 이룰 수는 없다. 장애인 집단의 힘으로, 어르신 집단의 힘으로 이미 다가 온 악재를 선재로 바꾸기는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원래 민주주의 행정이 추구하는 바처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각자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장애, 비장애 편을 갈라서 각자 자신의 주장만을 이야기한다면 강산이 몇 번 변해도 우리네 삶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논의에서 서로가 1만큼을 양보하여 한 발 앞으로 나아가고, 그 나아간 한 발자국 앞에서 다시 의논하여 또 1을 양보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선진 행정과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유럽의 행정은 느리기로 소문나 있다. 빠르기로 소문난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유럽과 우리를 비교할 때 선진 행정을 하는 나라가 어디냐고 물으면 물론 유럽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빠름은 편리함을 줄 수는 있지만 악재를 선재로 바꾸고, 개인을 '함께'로 만들 수는 없다.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 이제는 각자의 주장만이 난무하는 외형적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공감'을 바탕으로 상대방과의 진정한 합의점을 찾는 대타협의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악재'보다는 '선재'가 넘쳐나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