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모르면서 서울-파리행 기차에 오를 수는 없다.
공기와 물, 햇볕...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들이지만 이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심하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 중에 하나라도 부족한 곳으로 가야 할 일이 생기면 그제야 산소통을 메거나 우주복을 입는 등 북새통을 일으킨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치는 것들이 많다. 사회를 구성하는 제도, 규칙 등... 그것이 결여된 사회를 만났을 때 비로소 그 제도의 존재를 확인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어느 한 사회가 당연하게 마련하고 있는 규칙들이 다른 한 사회에는 없는 까닭은 여러 가지이다. 개별 사회문화 공동체는 각기 역사와 문화적으로 다양한 경로를 거쳐 오늘에 이른 탓이다. 그중에서 이 책이 주목하는 부분은 남한의 자본주의와 북한의 공산주의가 만난 개성공단에서 벌어진 당연한 것의 부재, 그 부재가 야기하는 문제,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다.
개성공단은 입주 초기 기업 간의 명확한 부지 구획이 필요했다. 허나 당시 북한은 모든 토지는 국가 소유이고, 개인이나 기업 간 토지 거래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지적도나 토지 측량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남한에서 관련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개성공단 지역의 측량을 끝내고 정확한 지적도를 마련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개성공단 입주 기업이 북한 당국에 내야 할 세금을 정하는 기준도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북한 당국은 해마다 일정 금액을 기업에 부과할 생각이었다니, 매출이나 이익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이 사업권에 대한 지세만 생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이 부분도 북한의 회계 담당자를 뽑아 남한과 중국의 회계 전문가들이 교육을 시켜 기업 회계 기준을 인식시키고 과세 규정을 마련했다고 한다.
개성공단이 폐쇄되기 전까지 기업과 관련된 부분뿐만 아니라 개성공단에서 근무하는 남북한 직원의 인권이나 저항권 등에 관한 규정도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등 공산당 1당 독재 체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법치주의 제도들이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개성공단에서 검증된 제도와 시스템은 나진선봉 지역의 경제특구에 확대 적용되기도 하고, 북한 내부에서 급속하게 번져가는 장마당에도 반영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합리적인 시스템의 부재로 인한 부정부패가 자라나고 있기도 한 모양이다.
개성공단은 북한 사회를 들여다보는 청진기이자, 시장 제도의 합리성을 주입하는 주사기 역할을 했다. 핵개발 자금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폐쇄되기는 했지만 그동안 개성공단이 북한 사회를 변화시킨 역할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과거야 어찌 되었건 우리는 지금 상상조차 하기 힘든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한 민족이 만났을 때 얼싸안고 둥실 거릴 수만은 없다. 분명히 다름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겪어야 한다. 이 책은 그 갈등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는 백신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Don't Panic. 지난 70년 동안 남과 북은 너무나 다르게 살아왔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책을 펼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