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구석구석 브뤼헤

혜나, 초콜릿을 득템 하다

by 기타치는 사진가

브뤼셀과 마찬가지로 브뤼허에도 한 집 건너 초콜릿이다. 역시 벨기에는 초콜릿의 나라가 맞다. 혜나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다. 한데 이 녀석 쇼윈도만 들여다볼 뿐 들어가 볼 생각을 않는다.


“시간 많으니 천천히 들어가서 구경해.”

“여태껏 본 가게는 브뤼셀에도 있던 가게들이야. 거기보다 작아.”


누군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랬다. 내가 보기엔 비슷비슷한 초콜릿들이지만 혜나에게는 다 나름대로의 특색과 매력을 뽐내고 있는 제각각의 제품들이다.


초콜릿 가게들을 무심히 지나치면서 셀카 찍기에 바쁘던 혜나 앞에 범상치 않은 포스를 뿜어내고 있는 가게가 나타난다. 밝은 베이지색 건물 사이로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갈색 적벽돌로 지어진 야트막한 건물, 초콜릿 포장처럼 1층과 2층 사이를 가로지르는 검은색 간판, 전면으로 넓게 열려있는 격자창 안쪽으로 전시되어 있는 화려한 초콜릿들,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과자집처럼 예쁘고 아담한 건물이 마치 ‘초콜릿을 찾고 있다면 어서 이리로 오시게나.’ 그윽하게 부르는 듯하다.



“와우, 저 집은 예사롭지 않은걸?”

“저건 그랑플라스에선 못 본 건데... 들어가 봐요.”


입구에서 한 걸음 들어서니 초콜릿 향이 은은하게 퍼져온다. 달콤한 과일향과 쌉쌀한 초콜릿 향이 섞이면서 머릿속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다. 가게 안은 생각보다 훨씬 아늑하다. 단지 서너 계단 내려왔을 뿐인데 바깥세상의 번잡스러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창 밖으로는 바로 앞을 지나는 사람들만 올려 보일 뿐 광장의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주인과 함께 산책하는 강아지들의 호기심 어린 표정만 유독 눈에 들어올 뿐이다. 넓지 않은 가게는 초콜릿으로 가득하다. 쓸데없이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하나하나의 선들이 예사롭지 않다. 하나하나가 조각품이다.


“아빠, 여기 초콜릿 장난 아니야.” 혜나의 감탄이 이어진다. 한참을 둘러본 혜나는 결국 종류별로 하나씩 담겨 있는 상자 하나를 골랐다. 가격도 생각보다 저렴하다. 나와서 검색해 보니 역시 브뤼셀에는 매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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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을 기웃거리며 걷다 보니 가게의 표정이 달라져 있다. 관광객 대상의 매장이 아닌 현지인들을 위한 매장들이다. 영어는 거의 사라지고 불어와 네덜란드어만 주로 보인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조용한 주택가가 나온다. 야트막한 2층에 반지하 주택들이 줄지어 이어진다. 벽돌의 만듦새를 보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아 보이는 건물도 있고, 바로 옆의 건물은 여러 가지 색의 벽돌이 부분적으로 벽을 이루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집들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이어진 도로 저 끝에는 중세시대에 성문으로 썼을 법한 높은 건물이 보인다. 열려 있는 성문으로 차들이 들어오고 있다. 예전에는 성문 옆으로 성벽이 이어졌을 테지만 지금은 성문만 남았다. 성문 밖에는 해자로 사용되었을 듯한 개울이 흐른다.


주택가는 여기저기 공사 중이다. 이 정도 연륜의 도시라면 보수 공사는 그저 일상의 한 부분일 테지. 낡으면 무조건 부수고 새로 짓는 우리나라의 도시와는 많이 다르다. 내가 성장하던 시절 서울은 빅뱅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산과 분당이라는 1기 신도시가 건설되고 입주가 시작되면서 서울 외곽의 중산층 주택가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강남은 워낙 인기가 있는 지역이라 살아남았지만 강북은 무너져 내렸다. 내가 살던 응암동 골목길도 한 집 두 집 일산 신도시로 나가면서 예전의 살갑던 골목 공동체는 증발해 버렸다. 골목에서 이웃하던 아주머니들은 일산에서도 가끔씩 모임을 갖는 것 같지만 함께 공놀이하고 뛰어놀던 아이들은 모두 흩어졌다. 이따금씩 어머니를 통해 듣는 소식이 전부일뿐이다.



일제의 수탈에 이은 근대화로 조상 대대로 터 잡고 살던 농촌이 해체된 이후 우리는 유목민의 정서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뿌리내리고 살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들 다른 동네를 꿈꾼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보다 더 나은 동네로 이사 가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내가 지금 사는 곳은 형편이 안되어 어쩔 수 없이 머무는 곳일 뿐이다. 그러니 주변에 정주고 기웃거릴 필요 없다. 어차피 저들도 언젠가는 어딘가로 떠날 사람들 아니던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을 꿈꾸고,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대치동을 꿈꾼다. 일산이고 목동이고 평촌이고 간에 어느 동네든 그 동네의 대치동이 있다. 대치동을 향해 가는 중에 잠시 이 곳에서 머물며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 가꾸어온 아름다운 거리를 걷다 보면 아파트 그늘에 가려 살고 있는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극명하게 비교된다. 편한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그럼 우리는 어찌하여야 하는지 고민도 하게 된다. 일단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동네에 조금 더 애정을 갖고 관심을 쏟으며 살아가는 게 우선이 아닐까 싶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점심시간을 넘겨버렸다. 벌써 2만 보 가까이 걸었다.


“혜나야, 우리 이제 점심 먹자.”

“응. 뭐 먹을까?”

“잠깐 구글에서 찾아보자. 어디 보자... 햄버거 어때?”

“뭐든~~ 배고파.”


마침 가까운 곳에 나름 평이 괜찮은 햄버거 집을 찾았다. 건물 가운데 마당이 있는 프랑스풍 건물이지만 인테리어는 현대적이다. 가로수길에 새로 생긴 고급 수제버거 집이라 해도 될 정도. 맥주의 나라인 벨기에 답게 맥주와 햄버거가 페어링 된 세트가 메인이다. 가게 이름부터 Beer and Burgers. 홉이 풍부한 쌉쌀한 벨기에 맥주와 불맛이 도는 두툼한 패티의 수제 햄버거는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더구나 호밀과 귀리로 만든 구수한 빵 사이에 지역에서 재배한 야채가 듬뿍 들어있는 햄버거라면 더더욱 잘 어울린다.



“아빠, 이제 우리 뭐할까?”

“글쎄다. 배도 부르고 동네 구경도 어지간히 했으니... 남은 건 유람 보트뿐인 거 같네?”

“그렇지? 우리 보트 타러 가요.”


실컷 구경하고, 맛난 점심으로 배 채우고, 이젠 뱃놀이다. 살면서 이리 팔자가 늘어지는 날도 하루쯤 있어야지.



오후가 되면서 브뤼허 거리엔 부쩍 관광객이 많아졌다. 오전보다 운하의 보트들도 더욱 분주해 보인다. 조금 걷다 보니 선착장이 보인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보트를 타기 위해 줄을 선다. 대기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두 번째 도착한 보트에 오른다. 금빛이 살짝 도는 백발의 60대 영감님이 오늘의 선장이다. 짙은 감색 티셔츠와 백발이 잘 어울린다. 얼핏 보면 해리슨 포드를 닮았다. 나직하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듣기 좋았지만 불어 악센트가 잔뜩 들어간 영어 설명은 알아듣기 힘들다.


30명 정도 탄 보트는 골목길처럼 연결되어 있는 수로를 구석구석 찾아다닌다. 걸어 다닐 때와는 달리 물에 비친 도시의 반영이 세월의 두께를 더욱 깊이 드리운다. 오랜 시간 수면과 맞닿아 있는 벽에는 이끼가 짙게 자라고 있고, 올려 보게 되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은 더욱 사뿐하게 느껴진다. 다른 보트와 마주치면 서로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하기도 하고, 물가에 마련된 카페에서 차를 즐기는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눈다. 4-500년 전과는 달리 이젠 이 곳에선 오가는 사람끼리 치열하게 밀고 당기는 거래도 없고, 여차하면 뒤통수를 후려치는 사기꾼도 없다. 다들 이 아름다운 도시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경계는 느슨하다. 느슨한 틈을 인사로 채우고 나니 그곳에서 미소가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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