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타임머신 브뤼헤

시간이 멈춘 도시, 영원히 흐를 도시

by 기타치는 사진가

하얀 두건과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 원피스를 입은 아랍 상인 한 무리가 길 건너편으로 다가온다. 내 앞에는 긴 칼을 차고 있는 인도 무사들이 아마도 부유한 상인일 듯한 인도인을 호위하며 길을 가고 있다. 덕분에 건너편보다는 이 편이 조금이나마 덜 붐빈다. 정수리에 머리가 없는 검은 망토의 젊은이들은 수도원에서 내려온 모양이다. 걸음은 경건하고 젊잖게 천천히 걷고 있지만 맨 뒤에 따라가는 청년의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바쁘게 사방을 훑고 있다. 송나라 상인과 고려인들이 조금 전에 저 앞 골목으로 바쁘게 들어간 것 같기도 하다. 따라가 볼까?


“아빠, 뭐해? 우리 어느 쪽으로 가 볼까? 여긴 브뤼셀하고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그렇지? 일단 저쪽 종탑 보이는 쪽이 중심가일 테니 그리로 가 보자. “


혜나가 부르는 소리에 중세에서 현재로 돌아온다. 주차장에서 나와 잠시 거리를 걷다 보니 마치 중세 한복판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온 세계의 관광객으로 가득 차 있는 브뤼허 거리는 사람들의 옷차림만 빼고는 시대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시간의 흔적은 켜켜이 쌓여 있지만 허술하거나 부실한 느낌은 전혀 없다. 벽돌과 대리석으로 견고하게 지어진 건물이 마주 보고 있는 브뤼허 거리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듯하다. 내 앞의 외국인이 벌컨이나 클링온 같은 외계 종족이라 해도, 길 모퉁이에서 스톰 투루퍼 한 분대가 발을 맞춰 뛰어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한참 국제 간의 교역이 벌어지던 14세기였다면 이 거리에는 묘한 긴장감이 안개처럼 내려앉아 있었으리라.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지구 반대편에서 교역을 위해 이 곳까지 오는 건 도박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래되는 규모 역시 어마어마했을 텐데 법보다는 칼이 훨씬 믿음직한 시기였을 테고, 크게 한몫을 챙기려는 상인들 곁에는 약삭빠르게 한 건 챙기려는 사기꾼들이 또한 꼬이는 법. 뒷골목 으슥한 곳에서는 은밀한 뒷거래가 이루어지고, 원한과 증오가 쌓여가다가 결국 칼부림으로 끝을 맺는 스펙터클한 드라마가 거리거리마다 남겨져 있을 테지. 그 이야기 한 자락씩을 펼쳐내어 소설이 만들어지고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펼쳐진 이야기 위에 상상력을 흩뿌려 스타워즈의 타투인 행성이 만들어지고, 매드맥스의 폐허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위에 또 다른 이야기 자락들이 펼쳐진다.


상상력이란 결코 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레고 블록처럼 의미 없이 시공간에 널브러져 있는 이야기 조각들을 솜씨 좋게 모으고 다듬어 조립해 내는 것이 상상력이다. 스타워즈의 상상력을 부러워하지만 외계행성의 기괴한 자연은 네바다나 유타의 사막지대에서 볼 수 있고, 허물어져 가는 도시의 모습은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에서 유추된 모습이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레고 블록이 방안에 가득하다면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상상력을 만들어 내는 블록들은 자연 속에, 역사 속에,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이미 차고 넘친다. 다만 그 조각들을 찾아내는 훈련이 모자랄 뿐이다.


21세기의 브뤼허는 이제는 거대한 테마파크가 되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미소를 머금고 즐겁게 인사를 나눈다. 늘어서 있는 초콜릿 가게들은 시간이 마련해 준 저마다의 세련됨으로 한껏 치장하고 손님을 끌어당긴다. 말발굽 소리는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길을 비켜주게 된다. 거리와 나란히 혹은 위아래로 교차하면서 거미줄처럼 도시를 연결하고 있는 수로에는 관광객들로 가득한 보트들이 물살을 가른다. 역시 북유럽의 베네치아라는 표현이 전혀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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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초콜릿 가게와 맥주 가게를 지나치고, 몇 개의 다리를 건너고 나니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마르크트 광장이다. 브뤼셀의 광장 그랑플라스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이 웅변을 하고 있다면 마르크트 광장의 건물들은 조근조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머리 위로는 전깃줄 한가닥 보이지 않고 손바닥만 한 박석을 부챗살 형태의 패턴으로 오밀조밀하게 깔아놓은 광장은 500년 전의 모습 그대로이다. 광장 한복판의 청동상 주변으로는 벨기에 국기, 유럽연합의 깃발과 함께 커다란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다. 아마도 지방 정부의 깃발들이겠지. 낮은 구름이 두텁게 덮고 있는 우중충한 날씨지만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는 관광객들을 마냥 즐겁다. 아직 점심시간이 되려면 시간이 좀 남았지만 광장 주변의 카페에는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아무리 맥주의 본고장 벨기에라지만 맥주를 마시는 사람도 제법 눈에 띈다. 살짝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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