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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타치는 사진가 Mar 15. 2019

소주면 다냐?

사라진 희석식 소주 표기에 던져보는 소소한 의심

'희석식 소주'라는 단어는 적어도 4-50대에게는 그다지 낯선 단어가 아니다. 거의 매일 마시던 초록병 소주 라벨에 늘 적혀 있는 글귀였으니까. 그래서 뭔지는 몰라도 물을 탄 술이라는 건 알고 있었고, 조금 지나서 독한 주정에 물을 타서 희석시킨 소주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주정은 90% 이상의 순수한 에탄올이다. 처음에는 쌀로 만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구마, 타피오카 등 저렴한 전분질을 발효시켜 만들어 낸다. 재료가 무엇이 되었건 간에 ‘순수’한 에탄올이니만큼 원재료의 향이나 맛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여기에 물을 탄다고 해서 없던 맛이 생길 리 만무하다. 결국 소주의 맛은 여러 가지 첨가물로 만들어 낸 맛이다. 


'우리 소주는 아스파탐 대신 스테비오사이드를 첨가해서 맛이 깔끔합니다.'라고 광고를 할 수는 없으니 잘 나가는 미모의 여성 엔터테이너를 모델로 쓴다. 맛으로 승부를 낼 수 없으니 이미지로 마케팅을 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 역시 '진짜 이슬' 혹은 '처음같이'를 선택할 때 맛이 아닌 이미지로 고른다. 아마 대부분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의 모델을 보고 고르지 않을까?


'희석식 소주'의 반대편에는 '증류식 소주'가 있다, 아니 있었다. 안동소주 같은 전통 소주와 함께 최근 들어 눈에 뜨이는 '화요'라던가 '일품진로' 같은 소주들이 여기에 속한다. 정성스럽게 빚은 청주(법적으로는 약주)를 증류기에 넣고 증류시켜 얻은 술이다. 증류 방식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증류하기 전 원주의 맛과 풍미가 담긴 깊은 맛이 난다. 


잠깐 옆 나라 일본으로 넘어가 보자. 술과 관련된 법과 제도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것들인지라 일본의 상황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일본도 희석식 소주가 있다. '갑류 소주'라고 분류한다. 증류식 소주는? '을류 소주'이다. 전후 극심한 식량난을 벗어나면서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을류 소주들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갑류 소주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저렴하게 취할 수 있는 서민들을 위한 술이었다. '소주'라는 명칭이 주는 저렴함을 벗어나고자 주류 업계는 '화이트 리큐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59년부터 규슈 지방의 양조업자들이 조직을 결성하고 증류식 소주에 대해 을류 소주라는 명칭 대신 '본격소주'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역사와 전통을 강조한 명칭이다. 


이후 양조 기술이 발전하면서 일본의 본격소주 시장은 급성장을 해왔고 이제는 청주시장을 위협하는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기린과 아사히, 산토리 등 대형 주류 제조사들까지 본격소주 시장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2006년에는 드디어 주세법이 개정되어 '갑'과 '을'이라는 서열적 분류 대신 '연속식 증류 소주(희석식)'와 '단식 증류 소주(증류식)'으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초록병 소주를 마실 기회가 있다면(오늘 저녁에도 마실 테니) 라벨을 유심히 살펴보자. 익숙했던 '희석식 소주'라는 표기 대신 그냥 '소주'라고 표기되어 있다. 어라? 어찌 된 일일까? 소주가 어느 순간 죄다 전통적인 증류방식으로 바뀐 걸까? 그럴 리가...


2014년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희석식', '증류식' 소주의 표기를 의무화했던 규정이 삭제되었다. 대신 재료 표시 중에 '주정'이 들어간다. 어떤 소주에는 '보리 증류주' 혹은 '쌀 증류주' 등이 재료로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그래 봐야 증류주의 함량은 0.5% 안팎이다. 함량을 아예 표시하지 않은 라벨도 있다. 


희석식 소주는 2014년 이후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다.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희석식 소주'라는 분류만 사라졌다. 희석식 소주가 그냥 소주가 되었지만 우리가 마시는 건 여전히 싸구려 주정에 물 탄 정체불명의 술이다. 이름만 여전히 '소주'라고 붙어 있을 뿐이다. 대표적인 증류식 소주 화요가 손익분기점을 넘긴 시기가 2015년이라는 사실, 롯데주류가 '대장부'를 출시한 것이 2016년이라는 사실을 놓고 짐작컨데 희석식과 증류식으로 나눈 분류 체계가 누군가에게는 제법 걸쩍지근했던 게 아닐까 의심을 해 본다. 


일본이 만들어 놓은 주세법 체계를 그대로 이어왔지만 지금 소주의 상황은 한국과 일본이 많이 다르다. 일본은 본격소주가 자리 잡고 세계로 뻗어 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 우리는 이제야 증류식 소주가 하나 둘 시장에 등장하고 있지만 그나마 있던 분류마저 없애버렸다. 몇십 년 전부터 전통적인 증류식 소주 제조업체들이 협회를 결성하고 본격소주 캠페인을 전개해 왔던 일본과 진즉에 대기업이 희석식 소주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한국의 차이가 이렇게 벌어져 버렸다. 


'김치'냐 '기무치'냐의 싸움은 '소주'냐 '쇼츄(소주의 일본 발음)'냐의 싸움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대로라면 '한국식 쇼츄'가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어쩌면 앞 글에 썼던 '약주'냐 '청주'냐의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지금 다시 옛 라벨을 찾아보니 ‘희석식 소주’라는 표기만 한자로 적혀 있다. 다른 첨가물은 모두 한글로 적혀 있는데… 이유는? 당신의 짐작이 맞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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