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차트가든을 꿈꾸는 소박한 작은 섬
뱃전에서 맞는 바닷바람이 상쾌하다. 그리 높지 않은 건물들을 뒤로 하고 야후돔과 후쿠오카 타워가 만들어 내는 바다 저편의 스카이라인 역시 깔끔하다. 하늘은 푸르고, 바다색은 더 푸르다. 잔물결이 부서지며 만들어 내는 물거품은 인어공주의 피부결 만큼이나 새하얗게 빛난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진다.
후쿠오카 시내에서 지하철로 20여분, 메이노하마 역에서 택시로 10분 정도면 선착장에 다다른다. 선착장에서 배로 10분 정도면 노코노시마에 도착한다. 볼 것 없이 전기 자전거를 빌린다. 처음 왔을 때 일반 자전거를 빌려 놓고 가파른 산길을 끌고 올라간 생각을 하면 몇 백 엔 더 내는 게 결코 아깝지 않다. 간단히 이름을 적고 보증금을 내고 자전거로 섬 여행을 시작해 본다.
목표는 섬 꼭대기에 있는 아일랜드 파크. 예쁜 꽃밭이 있고, 너른 잔디밭에서 후쿠오카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여름엔 맛있는 빙수를 파는 그런 곳이다. 자전거 대여소에서 나와 오른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바다를 끼고 자그마한 시골길을 달린다. 파도가 부서지는 푸른 바다는 배 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있다. 한가한 일본의 시골 마을을 지나며 마주치는 주민들에게 가볍게 목례도 건네 본다. 마을을 벗어나면서 길은 점점 가팔라진다. 산길로 접어 들고 있다. 전기 모터의 힘이 느껴진다. 제법 경사가 있는 산길이지만 페달이 가볍다.
깊어 가는 숲 사이로 이따금씩 보이는 후쿠오카 시내가 눈 아래로 내려 보이기 시작한다. 경사가 급해지면서 땀이 나기는 하지만 전기 모터의 도움으로 그다지 힘이 들지는 않다. 딱 기분 좋을 만큼 부하가 걸린다. 산이 높아지는 만큼 바람도 시원해지고 시야도 넓어진다. 아래쪽으로 해안가 캠핑장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런 곳에서 하룻밤 캠핑하면서 보내는 것도 참 좋겠다 싶다. 산길을 오르는 사이 어느덧 한적한 주택가가 나오고 이어 아일랜드 파크의 입구가 나온다.
자전거를 세우고,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한 후 아일랜드 파크에 들어선다. 예쁘장한 꽃밭과 잘 가꾸어진 정원이 눈 앞에 펼쳐진다. 일본인들의 취향대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4-50년대 일본풍의 찻집과 기념품점, 도자기 체험장 등이 나온다. 어디든 관광지의 풍경은 비슷비슷하다. 자그마한 민속촌 같은 거리를 지나가면 멀리 바다가 보이고 널디 너른 꽃밭이 펼쳐진다. 아일랜드 파크의 자랑거리인 꽃밭이다. 계절마다 튤립, 장미, 유채꽃, 코스모스 등이 번갈아 가며 장관을 펼친다...라고 관광 안내 팸플릿에는 나와 있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갈 때마다 꽃을 바꿔 심고 있는지 황홀한 꽃밭의 풍경은 만나질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한가하니 유유자적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목이 마르거나 덥다면 언덕 위 식당에서 음료수나 빙수가 준비되어 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후쿠오카 시내를 내려다 보며 먹는 아이스크림과 빙수의 맛이 훌륭하다. 카레라이스나 우동 등 간단한 식사도 가능하다. 심지어 1인당 2만 원 정도의 예산이면 아쉽지 않게 숯불 바비큐를 즐길 수 있다. 언젠가 가족들과 함께 이 곳에 올 기회가 있다면 꼭 한 번 해 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
천천히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예쁜 꽃밭에서 사진도 찍고,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벤치에서 바람도 쐬고 하다 보면 한 시간 정도는 후딱 간다. 일정에 쫓기지 않는 한가로움, 자유여행이 주는 즐거움이다. 슬슬 내려갈 준비를 할 때가 되었다. 매표소 옆에 세워놨던 자전거를 다시 챙긴다. 다섯 칸인 배터리 게이지가 한두 칸 밖에 남지 않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여기부터는 줄곧 내리막이다. 이번엔 올라온 길과는 반대편으로 섬을 돌아본다.
아일랜드 파크에서 오른편으로 섬을 돌아 내려가는 길은 자전거와 보행자 전용도로이다. 보행자는 그리 많지 않고, 자전거도 그다지 많지 않다. 대부분 버스로 오르내린다. 서너 번 친구들을 데리고 노코노시마를 안내해 본 경험상 노코노시마의 즐거움 중 70%는 이 쪽 산길을 자전거로 내려가는 데에 있다. 울창한 원시림 사이로 아기자기하게 펼쳐진 산책로, 빼곡히 솟아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눈 앞에서 반짝이는 햇살 조각들, 이따금씩 그 틈으로 보이는 푸르디 푸른 바다,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 동화나 영화 속에 내가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이렇게 한참 내달리다가 토토로의 푹신한 뱃살에 푹하고 파묻힐 것 같은...
내리막길은 대숲과 삼나무 숲이 번갈아 가며 이어진다. 나뭇잎의 모양새에 따라 눈앞에서 부서지는 햇살의 모양새도 달라지고 햇살의 명암이 만들어 내는 리듬 역시 달라진다. 어느새 바다는 훌쩍 눈 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 살짝 겁이 날 정도로 가파른 마지막 내리막을 지나면 다시 한적한 바다가 마을이 나온다. 코리노보리(잉어 모양의 깃발을 높게 걸어 놓은 것)를 보면서 여기가 현실 속의 일본임을 상기해 낸다. 배터리 게이지는 마지막 한 칸이 껌벅거리고 있지만 여기서 대여소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다.
자전거를 반납하고 돌아가는 배편의 티켓을 구입하고 나면 선착장 주변을 돌아다녀도 좋고, 선착장 옆 장터를 구경해도 좋다. 오랜만의 자전거 하이킹에 배가 출출해졌다면 자전거 빌려주시던 할머니가 만들어 주는 노코노버거를 먹어도 좋다.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 주던 짝퉁 햄버거 바로 그 맛이다. 햄버거 패티가 아닌 부침개가 들어 있는 그 짝퉁 햄버거!
후쿠오카를 온다고 해서 노코노시마를 들르기는 쉽지 않다. 교통이 그다지 친절한 편이 아니다. 지하철이 빠르긴 하지만 택시를 한 번 타야 하고, 하카타 역에서 버스는 한 번에 오기는 하지만 하세월이다. 일본어를 못하는 분에게는 더더욱 여기를 찾아와서 혼자 놀고 가라고 권하기 힘들다. 하지만 일본 여행에 익숙하다면, 혹은 같이 바디랭귀지를 구사할 용기가 있는 일행과 함께라면 꼭 한 번 찾아 보기를 권한다. 화려하고 세련된 해외여행의 추억은 아닐지 몰라도 투박하면서도 동화 같은 여행의 추억 한 자락은 분명히 챙겨 돌아갈 수 있을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