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유통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
자본주의 사회는 시장에서의 거래를 통해 경제활동이 이루어진다. 책 역시 시장을 통해 거래가 이루어진다. 같은 책이라도 여러 가지 다양한 시장을 통해 거래가 이루어진다. 온라인 서점과 오프라인 서점은 구분할 수 있는 시장이다. 다양한 책을 함께 보면서 필요한 책을 고르는 대형 서점과 책방 주인과 대화하면서 필요한 책을 고르는 동네 서점 역시 구분이 가능한 별개의 시장이다.
좀 더 확장해 보면 장소나 매체가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오늘 책이 팔리는 시장과 두 달 뒤에 팔리는 시장은 다른 시장으로 볼 수 있다. 시장에 참여하는 공급자와 수요자의 입장이 달라졌을 테니 말이다.
도서정가제는 각각의 시장에서 같은 책은 동일한 가격으로 팔리도록 강제하는 정책이다. 다시 말해 최종 소비자가 책을 구매하는 시장의 가격을 동일하게 통제하는 정책이다. 대규모 자본을 갖춘 거대 사업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가격 경쟁은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가격 이외의 요소들을 가지고 경쟁을 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인 것이다.
문제는 책과 관련된 시장은 소비자가 마주치는 시장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시장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서점 역시 책을 공급받게 된다. 도서정가제로 통제되고 있는 소비 시장과는 달리 공급 시장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당연히 구매력이 있으면 가격 협상의 여지가 크고, 대형 서점일수록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도서정가제의 가장 큰 문제는 여기에 있다. 소비자 시장 가격은 통제를 하지만 공급자 시장은 완전 경쟁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자본력에 휘둘릴 수밖에 없고, 영세한 출판사나 영세한 서점은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게다가 더 낮은 가격에 공급받는 상황에서 판매 가격은 일정 수준 이상 내리지 못하니 대형 서점들은 오히려 고마울 수밖에. 그야말로 꿀 빠는 상황이다. 중소 출판사나 서점으로서는 공급 시장에서는 경쟁에 치이고 있지만 그나마 소비 시장만이라도 보호를 받고 있으니 없는 것보다는 나은 상황일 테고.
공급 시장의 유통구조는 철저하게 규모의 경제가 작용한다. 대형 서점들은 구매력을 이용하여 출판사로부터 직접 책을 공급받는다. 대략 정가의 60% 수준에서 공급받는다고 한다. 대량으로 거래가 이루어질수록 이윤이 커지다 보니 작고 영세한 출판사의 책은 어지간한 히트작 아니면 취급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대형 출판사와 대형 서점 간의 규모에 의한 공생관계가 형성된다.
영세한 출판사나 서점은 도매상을 통한 유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유통 과정에 참여자가 늘어나니 출판사나 서점이 챙길 몫은 더더욱 줄어든다. 작은 서점은 대략 75% 선에서 도매상으로부터 공급을 받는다. 10% 할인해서 팔고 나면 임대료도 겨우 낼 정도의 마진뿐이다. 굵직한 거래처들은 직거래로 빠져나간 도매상 역시 꿀꿀하긴 마찬가지. 두 번이나 부도를 내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영세 출판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송인의 사례는 상황을 웅변한다.
소비자 시장에서의 가격만을 통제하고 있는 현재의 도서정가제는 반쪽, 아니 반의 반토막 짜리 정책일 수밖에 없다. 중소 서점을 보호한다는 정책 뒤에서 정작 대형 서점만 웃고 있는 형국이다. 도서정가제의 저 뒤편에서는 여전히 규모의 경제, 자본의 횡포가 횡행하고 있다.
마케팅 능력은 따지지 말고, 비슷한 기능을 하는 전자제품이 하나는 100만 대가 팔리고 하나는 500대밖에 못 팔았다고 하면 분명히 기능에 문제가 있거나 상품성이 낮은 제품이라고 볼 수 있다. 500대밖에 팔리지 않은 제품은 시장에서 퇴출되는 것이 시장경제의 효율성이고 미덕이다. 같은 기능이라면 500대를 만드는 것보다는 100만 대를 생산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규모가 커질수록 생산비용과 시장에서의 거래비용이 낮아지는 규모의 경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00만 권이 팔린 대중적 소설과 500권이 팔린 아프리카 소수부족에 관한 사진집을 놓고 사진집이 퇴출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500권으로는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장에서 퇴출되는 것이 전체적인 효율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쓰레기보다 못한 책도 있다. 이런 책은 시장에서 퇴출되어 마땅하다. 하지만 그 기준은 전적으로 책의 내용과 가치에 따른 것이지 시장에서의 판매량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적어도 책과 관련된 시장에서 규모의 경제가 가져오는 이점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도서 시장에서 규모의 경제는 문화적 획일성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도서정가제의 존폐를 논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나마 무차별적인 시장 원리로부터 도서 시장을 보호하고 있는 유일한 보호막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유통과정 전반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획기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과격한 방안일 수도 있겠지만 온라인 서점을 오픈 마켓 형태로 바꾼다거나, 아예 기존의 오픈 마켓에 출판사가 입점하여 직접 소비자와 거래를 하도록 한다거나 하는 방법은 대형 서점의 규모의 경제를 제거하는 방안이 될 수 있겠다. 혹은 현재 완전 면제되고 있는 부가가치세를 적용하고 일정 규모 미만의 출판사나 서점은 전액 환급해 주는 방안도 있을 수 있다. 저자나 역자가 직접 스스로의 책을 판매하거나 유통하는 협동조합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도서정가제에 대한 갑론을박은 소모전에 불과하다. 시장 전체를 개선할 수 있는 창의와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